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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도'가 오픈하는 가운데 사도세자 이선은 왜 뒤주에 갇혀 죽었을까 다시 되내어 보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진정한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조선시대 탕평책으로 유명한 영조가 왜 아들인 사도세자와의 관계가 틀어져 자식을 비참하게 죽이는일이 발생했을까요? 당시 영조는 경종 살해사건에도 의심을 받고 있었으며 정실 핏줄이 아니라는 여러가지 컴플랙스를 가질 수 있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 두가지 컴플렉스에 휩쌓였던 영조는 이 스트레스로 인해 사리분별,판단하는데 분명 정상은 아니였을거라 생각됩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정조를 세손으로 세운 사유는 몇가지로 축약됩니다. 첫번째로 성격에 차이가 있었는데 영조는 급하고 다혈질인 성격인 반면에 사도세자는 과묵하고 차분한 성격이었으므로 서로 상극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과 기름이 만나 아마도 많이 부딪혔을것이라는 성격상의 차이가 문제가 컸을것이라는게 예상이됩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정치적요인이 있습니다. 영조가 밀고있던 탕평당에 대한 사도세자의 비판적인 시각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탕평책에 힘을쓰고 일생을 걸고 추진하는 정책에 그의 자식이 비판적이라는것에 원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도세자의 친소론적인 태도가 영조를 스트레스 주기에 충분했다고 봅니다.


세번째로 영조는 경종의 죽음에 대해 컴플랙스를 가지고 있었지만 사도세자는 그의 죽음에 대해 동정적인 입장을 띄고 있었기에 문제가 생겼으리라 생각됩니다. 위와같이 성격,정치적인요소,경종에 대한 견해의 차이가 거의 극과극을 달리며 자식이 아닌 원수사이로 변해가는것을 보면 끝내 임오화변으로 사도세자를 보내는 충분한 예상 포인트라 생각되는 부분입니다.


이번에 오픈하는 영화 '사도'에서 영조가 사도사제에 대해 성격,정치적인 요소,경종에 대한 견해 이 세가지를 어떻게 표현해 임호화변으로 끌고갈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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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문명의 성격과 실패의 원인이 무엇일까? 조선시대가 실패한 문명으로 역사에 기록되게 될때까지 원인과 문명의 성격에 대해서 포스팅해봅니다. 조선시대의 성격으로 볼때 조선은 충분히 성공할 수 있는 바탕을 가지고 출발했습니다. 정도전에 의해 시작된 이 문명은 이씨왕조와 썩은 관료들에 의해 점점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시대 문명의 성격은 네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조선사대의 문명은 첫번째 과거제도를 통해 양반관리를 선출하는 관료사회였습니다. 두번째로 주자학을 바탕으로 하는 문치주의였으며 세번째로 법률과 무력이 아닌 교화로 다스리는 인본정치였습니다. 네번째로 왕권과 신권이 권력을 공유하며 균형을 이루는 시스템조직으로 이루어진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네가지가 조선의 문명은 충분히 성공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시스템이 권력투쟁과 경제이득의 독점으로 이어지면서 건강하고 투명했던 사회기풍과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나아가 두 차례의 전란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대한 자기반성과 슬기로운 극복을 통해 사회분위기를 전환시키고 미래지향적인 대안을 찾아야 했는데, 곧바로 당행으로 치달을면서 조선사회는 내부자산을 갉아먹는 자기부패의 먹이사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조선의 문명은 충분히 성공할 수 있었던 가능성이 있었고 근대화의 전환점에 민족의 운명을 책임질 수 잇는 독창적인 문명이었습니다.





조선은 적어도 아래 6가지에 대해 반성과 교훈을 찾지못하고 실패한 세력을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근대화를 슬기롭게 맞이하지 못하고 외세의 힘과 타율에 의해 개화되는 불행과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끝내는 국권을 상실하게 되었죠. 


첫번째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두번째 훈구파의 권력 장악과 부패

세번째 2대 전란에 대한 책임의 부재

네번째 건설적 대안이 없던 당파논쟁

다섯째 정조개혁의 좌절

여섯째 60년 세도정치


조선은 전기,후기에 걸쳐 여러차례 변화의 기회를 맞이했으나 이상의6가지 요인에 의해 자기발전의 토대를 쌓지 못하고 실패한 문명으로 역사에 기록되게 되었습니다.(참고서적 : 단숨에 읽는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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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공신들의 권력다툼으로 일어난 이괄의난 발생과정


인조반정을 계기로 정권은 북인에서 서인으로 교체되었습니다. 친명 배금의 사대주의가 뿌리내리게 되었고 친명 배금 정책은 결국 정묘호란,병자호란을 불러 임진왜란 이후 막 수습되던 국가의 경제와 기반이 한번에 쓰러졌습니다.


인조는 여주에 유배중인 이원익을 영의정에 임명했고 김신국에게는 호조판서를 맡겼습니다. 김류,이귀,신경진,이서는 4대장으로 불렸고 이들은 나라에서 많은 지원을 받았는데 지원이란 400여명의 군관을 이야기 합니다. 반정공신 33명은 세등급으로 나누어 등급별 공신으로 분류했고 이것도 서로 공정치않아 서인끼리도 다툼이 생겼습니다.


이 서인들로 이루어진 반정세력은 애초에 백성을 위한 생각은 없었기에 반정에 성공한뒤에도 같은편끼리 다투는 이괄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이괄은 인조반정에 가담해 거사의 작전 지휘를 맡아 반정에 성공하게 되는 인물인데 이괄은 반정군 대장 임무를 맡았지만 김류에게 대장의 자리를 내줄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큰 공을 세웠지만 처음부터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2등공신으로 봉해졌고 한성판윤이었다가 평안병사 겸 부원수가 되어 영변으로 가게 됩니다. 공을 세운것에 비해서는 2등공신으로 책봉되었기 때문에 내심 불만을 가졌을것이라 예상되는 부분입니다.


이괄이 평안 병사로 부임하던 당시는 후금의 누르하치가 명을 정복하는 시기라 언제 조선을 침략할지 몰랐기 때문에 북방을 수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였습니다. 북방수비로 경험이 풍부한 이괄을 보냈는데 이괄은 꽤 많은 병력을 확보하게 되지요. 인조반정때 반대세력을 경계하던 공신들은 이괄을 이용해 남아있는 광해군친분있던 북인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게 되었습니다. 



이괄의 아들인 이전,한명련,정충신등이 변란을 꾀하고 있다고 인조에게 고변을 했는데 이는 문회,허통이 고변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괄을 신임하던 인조는 쉽게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사끝에 무죄가 밝혀지자 문회,허통을 사형시켜야한다고 주장했으나 서인세력의 반대로 실행되지 못하였고 허위사실임이 밝혀졌는데도 아버지인 이괄을 부원수직에서 해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무능한 왕에 무능한 서인들까지 거의 나라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썩어빠진 정부였고 조선 최악의 부패정부라고 해도 반론할 수 없을것 같습니다. 


그런데 무능한 인조는 이괄을 아들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한양압송을 위한 영변을 보냈고 이것이 화근이 되어 이괄은 역모로 몰고있는 서인세력에 분개를 하고 일을 치게 됩니다. 이로인해 이괄의 난이 시작되는 계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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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과 예송논쟁,기해논쟁의 시대


이번 포스팅은 현종의 예송논쟁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현종은 중국에서 태어난 유일한 왕이며 후궁을 한명도 두지 않는 왕으로 유명합니다. 현종시대에 예송논쟁이란 무엇인지 현종의 시대에 힘의 균형은 어떠했는지 포스팅해봅니다.


현종은 1659~1674년에 군림했으며 1641년에 심양에서 태어났습니다. 현종의 시대는 예송논쟁의 시대라 불렸는데 이는 인조반정 이후에 병자호란과 북벌에 시달렸던 조선내부 사정이 어느정도 안정기를 맞이한때였습니다. 예법과 이념을 둘러싼 내부 문제로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기 시작했던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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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드라마 화정으로 인해 인조반정이 이슈가 되고있는데 그때로부터 50년 후에 이야기로 이해하면 될것같습니다. 이 예송논쟁은 기해논쟁으로 1659년에 효종의 상례에 자의대비가 3년 복을 입어야 할지,1년복을 입어야 하는지를 놓고 벌인 논쟁입니다.



남인인 윤휴,윤선도는 효종을 인조의 법적인 장남으로 여기고 자의 대비가 3년복을,서인 송시열은 효종을 혈통상 차남으로 여기고 1년 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라 1년 복으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서인과 남인은 공조는 무너지고 150년에 걸친 대격돌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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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예송논쟁은 갑인논쟁으로 1674년에 효종비 인선왕후가 사망하자 자의대비가 며느리의 상례에 1년 복을 아니면 9개월 복을 입어야 하는지를 놓고 다투었습니다. 솔지깋 말하면 뭐 이런것을 가지고 논쟁을 하고 오랜 당파싸움가지 가느냐에 대한 생각으로 필자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만 듭니다. 하여튼 어느정도 왕권을 강화한 현종은 9개월 복을 주장한 서인을 불경죄로 몰아내고 남인 허적을 영의정으로 삼아 정권교체를 단행하기에 이릅니다.


인조반정 이후 50년만에 이런 논쟁으로 서인정권이 무너지고 남인정권으로 교체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6개월도 못되어 현종이 갑자기 죽으면서 서인과 남인의 대결은 환국정치라는 치령한 정쟁으로 치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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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능양군은 어떤사람이었을까?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화정을 보면 권모술수에 능하며 왕답지 않고 무능해보이는 능양군이 실제 어떤사람이었을까 궁금했습니다. 실제 화정이라는 드라마에서 얼마나 역사에 가깝게 인조를 그렸는지도 모르는것이라 역사를 토대로 능양군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그리고 후대에 어떤일에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포스팅을 해봅니다.


광해군 역할의 배우 차승원씨

 

광해군을 폐위시킨 능양군의 인조반정은 인조를 추대하는 세력이 반정을 도모하여 인조가 왕위에 오르는것을 인조반정이라 합니다. 또다른 반정중 하나인 중종반정과는 반정의 성격이 약간 틀리다고 할 수 있는데요. 같은 반정이지만 반정을 도모한 무리들이 인재를 물색해 왕으로 추대하는것이 아니라 직접 반정에 깊히 관여하여 왕족인 본인이 왕위에 추되되는 반정이라는 것에 성격이 약간 틀립니다. 


 

왕의 위치에 오지 못할 사람이 그 자리에서 감투를 썼을때 후대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합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각자의 직장인 회사에서도 능력이 되지 않는 사람이 상사의 자리에 있으면 아래 실무자 혹은 직원들이 상당히 일하기가 힘들어지는 이치와 같습니다. 조선 최악의 왕으로 꼽히는 3대왕중에 인조를 무능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을정도인데 그런 인물이 왕이 되었기 때문에 후에 조선백성들과 조선의 불운도 함께하게 됩니다.




 

광해군은 금,명나라와 중립적 외교를 펼쳐 양국을 저울질하는 역할을 했지만 인조의 경우는 한쪽으로 치우친 친명배금의 외교정책을 펼쳤습니다. 명나라와 친분을 도모하고 금나라를 배척하는데 문제는 금나라의 후손들인 여진족들이 후금을 만들어 힘이 강해지기 시작하게 되는 시기였습니다. 화정에서 보면 광해군이 강해지는 후금을 두고 심사숙고 하는 장면이 여러번 나오는데 이때 중국 배경이 명나라가 후금에 밀리기 시작하게 되는 시점입니다. 그리고 후금이 명나라의 멱살을 잡고 흔들정도로 힘을키운 후 청나라로 국명을 바꾸게 됩니다. 그리고 인조의 조선을 질근질근 밟아주게 되는거죠. 명분에 사로잡혀 병자호란을 부른것이 됩니다. 



드라마 꽃들의 전쟁의 삼전도로 향하는 인조

 

병자호란에서 청나라에 심각하게 밟히는 이유는 무능한 정부의 외교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명나라와 청나라의 힘의 차이를 읽지못했던것이 가장 큰 원인이며 최초 후금은 4만명의 병사를 끌고 쳐들어왔지만 명과의 관계 때문에 조선과 형제의 관계를 맺고 돌아가지만 후에 명나라를 짓밟은 후에 16만대군으로 다시 쳐들어옵니다. 4만도 이기지 못하는 조선에 15만의 대군이 청의 이름으로 바꾸고 형제의 협약 업그레이드인 군신의 관계를 요구하자 인조가 발끈하며 전쟁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전국에 격문을 보내 청의 공격에 대비하라는 지시를 합니다. 도대체 뭘 믿고 발끈 했는지는 이해할 수 가 없는 부분입니다.

 

광해군의 경우 국제정세를 읽어 중립외교를 했었지만 임진왜란을 명이 도와줬다는 이유로 광해군에 반기를 들어 인조를 왕으로 세워 반정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죠. 그 인조반정이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된것이었습니다. 그당시 동아시아의 정세는 명,청 교체기였는데 국제정세를 읽지못한 조선왕조의 문제가 치명적이었습니다. 솔직히 개인적인 생각으로 인조가 아무리 무능한들 명나라와 청나라 어떤 나라가 대세로 가는지 몰랐을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왕 보다는 그를 추대한 추대세력간에 문제가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전국에 격문을 보내 청에 공격에 대비하라는 이야기를 들은 청의 홍타이치는 16만에 4만을 보태 20만으로 남한산성으로 쳐들어가 둘러싸버리고 도망갔던 인조의 가족들까지 싹다 잡아와 항복을 요구하고 군사도 군량도 없는 인조는 항복을 결정하게 됩니다. 항복을 결정을 했으면 대가가 있어야 겠죠? 50만명의 부녀자가 명으로 끌려갔고 그때 살아돌아온 여자들을 화냥녀라고 불렀습니다. 보통은 냉대와 멸시를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끝내 살아서 돌아온 여자들도 목을 메거나 매춘으로 살아가는 비참한 생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추가로 삼전도의 굴욕이 있는데 원래는 청나라에서 반합을 요구했습니다. 반합은 항복을 하는 의식같은것인데 죽은사람처럼 구슬을 물고 빈관과 함께 손을 묶은채로 항복을하는것입니다. 간신히 설득하여 삼배구고두래로 협의를 보게됩니다. 삼배구고두례는 여진족의 풍습으로 한번절할때 세번 이마를 땅에 찍는 풍습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세번했고 처음에 이마를 살짝 찍어서 몇번 더했다는 속설이 전해집니다.


드라마에서 인조의 삼전도의굴욕

 

고려때는 원나라에 항복해 고려가 복속되는 개념이었는데 청나라는 항복을 받고 대가를 받은뒤 조선을 자유롭게 놓아줍니다. 아주 자유롭지는 않았지만 항복하는 개념에서는 자유롭다고 할수 있었습니다. 인조 뒤를 이은 효종이 더욱더 이를갈고 북벌을 준비 했지만 힘의 차이때문에 시작도 못했습니다.




 

대한민국의 2대 국가치욕 중 하나인 병자국치는 위에서 이야기 한 남한산성에서 혹한속을 걸어 송파나루에 있었던 삼전도까지 와서 치욕을 당했으며 항복을 기념하고자 세워진 대청황제공덕비인 삼전도비를보며 부끄럽지만 잊지 말아야할 역사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인조는 이후에도 멈추지 않고 유능한 소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가는등에 무능한짓을 하며 조선을 더욱더 암울한방향으로 몰고갑니다. 요즘 광해군의 재해석이 되면서 인조도 새롭게 무능한 왕으로 비교되고 있는가운데 중요한것은 역사를 보며 부끄럽게 여기고 잊지 말아야할 기억으로 삼고 되풀이되지 않는길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좋은 본보기라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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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릉수목원(국립수목원)에 들렀다 조선 7대왕인 세조의왕이 광릉이라는것을 알고 왕의무덤에 찾아가보기로 했습니다. 어릴적 왕릉은 한두군데 갔던 기억이 있는데 흐린기억밖에 없어 이번에 한번 다녀왔습니다. 주차장에서 바로 왕릉이 있었으며 좋았을텐데 광릉의 스케일때문에 한참을 걷고 오르막을 올라야 세조와 정희왕후를 뵐 수 있었습니다.



광릉의 위치는 광릉수목원이라 불리는 국립수목원과 800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매우 가깝죠? 수목원을 들르면서 돌아오는길에 들렀습니다.





입장료는 어른 1000원이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곳입니다. 위에 보이는 역사관과 화장실 그리고 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는 중간에 집이 보이는데 너무 더워서 들르는걸 깜빡해버렸습니다.


광릉의 위치





역사문화관에 내부에는 광릉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되어있었습니다. 패기의 왕답게 왕릉의 스케일도 컸는데 왕릉을 본 후 왜 저는 썰매장이 생각나는지...



올라가는 길목에는 광릉의 설명이 자세히 적혀져있는곳들이 있습니다. 광릉은 산림욕이 가능할정도로 많은 수풀이 우거져 있습니다. 그 사이를 뚫고 열심히 올라가야 세조와 정희왕후를 뵐 수 있습니다.



세조의 유훈에 따라 광릉은 능 내부에 석실을 만들지 않고 능 내부와 관의 사이를 석회로 메워 다지는 회격 방식으로 조성하여 소요 비용과 인력을 절약하였고 또 같은 이유로 봉분 둘레에 둘려 세운 네모난 돌인 사대석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기존에 사대석에 새겼던 12지신을 난간석 기둥에 새겨넣게 되었으며 이러한 회격을 사용하여 능 내부를 조성하는 방식은 세조의 광릉 이후 조선왕릉 조성의 새로운 규제가 되었습니다.



나무들이 엄청나게 큼직큼직하더군요. 광릉지에 따르면 광릉은 동대문 밖 동쪽 60리 양주 동쪽 41리 주엽산 아래 자리를 잡았고 풍수 사상에 따라 왕릉 뒤편에 운악산을 주산으로 삼고 정남향의 세조릉은 마주보는 백령산을 안산으로 삼았으며 남서향의 정희왕후릉은 천령산을 안산으로 마주하였다고 합니다.



광릉은 세계문화 및 자여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세계유산 광릉은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능으로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우 ㄴ자연이 어우러진 신성한 공간이며 지금까지도 이곳에서 제례가 이어져 오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입니다.



30도가 되는 땡볕에서 정희왕후릉을 다녀왔습니다. 저만 올라갔다왔는데 정말 힘들더군요 ㅜ.ㅜ



세조의 유훈에 따라 광릉은 능 내부에 석실을 만들지 않고 능 내부와 관의 사이를 석회로 메워 다지는 회격 방식으로 조성하여 소요 비용과 인력을 절약하였고 또 같은 이유로 봉분 둘레에 둘려 세운 네모난 돌인 사대석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기존에 사대석에 새겼던 12지신을 난간석 기둥에 새겨넣게 되었으며 이러한 회격을 사용하여 능 내부를 조성하는 방식은 세조의 광릉 이후 조선왕릉 조성의 새로운 규제가 되었습니다.



위 사진의 앞계단부터는 출입금지라서 들어가지 못합니다. 수백년을 이어져온 이 유산의 가치를 느낄 수 있었는데요 세조의 명으로 능의 내부가 아닌 외부에 지어져 지속적으로 비바람에 깎인 구조물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광을이 있어서 이곳을 광릉숲이라고 부른다고 하네요. 광릉의 부속림으로 왕릉 사방 15리의 숲을 조선말기까지 출입을 막고 철저하게 보호했다고 합니다. 조선 초기부터 지금까지 500여년 이상을 철저히 보호되고 관리되어 역사적,문화적,학술적 중요한 가치를 지닌 광릉숲이 된것입니다.



우거진 수풀을 담으려다 빛 플레어 현상을 담았네요. 세조의 릉을 다녀오고 싶었으나 현재 세조의릉은 출입금지하여 통제상태에 있어 못갔습니다. 위에 사진은 정희왕후릉의 사진입니다. 올라가서 구조물을 정면으로 왼편은 세조,우른편은 정희왕후릉입니다. 일부러 광릉을 찾기보다는 광릉수목원(국립수목원)을 다녀가는김에 들르면 딱 좋은곳으로 생각되네요. 패기의 군주였던 세조와 정희왕후를 만나러 한번 가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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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 광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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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어떻게 알려져있나?


역사는 암기식 공부를 하는것이 아니라 질문을 계속 던지는식의 공부를 해야합니다. 질문을 던져 토론을 통해 살이있는 역사공부를 해야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고 또한 재밋는 공부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을 계속 외우기 보다는 왜 그렇게 했어야만 했는지 이야기로 기억하는 방법을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광해군은 재조명되는 왕으로 머리가 좋고 유능하고 대동법을 실시하여 민생을 안정시켰으며 외교의 달인으로 알려져있습니다. 하지만 불운하여 왕에서 짤려 조선역사에 이름이 올라있습니다. 이런 중요한 포인트들이 왜그렇게 알고있는지 문제는 무엇인지 한번 알아보았습니다.


광해군의 가족환경과 임해군


광해군의 아버지인 선대왕 선조는 정식부인이 2명이었습니다. 첫번째는 의인왕후였는데 자식을 낳지 못하였고 임진왜란 끝나고 사망하게 됩니다. 당시 후궁인 공빈김씨에게 물려주어야 했는데 원래는 첫째인 임해군을 세자로 임명해야 했으나 임해군의 성정이 엉망이라 세자자리를 물려주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엉망이었냐 하는것은 여러가지 였는데 특히 뇌물과 방납의 달인이었다고 합니다. 방납은 공물을 대신 납부하고 이자를 받는일을 말하는데 얼마나 심했냐면 임진왜란이 일어났을때 궁궐을 비우고 선조가 도망갔을때 백성들이 궁궐을 불지르는등의 왕에대해 배신감을 느껴 이런일들을 저지리는데 그때 백성들이 가장먼저 찾아다녔던것이 임해군이었다고 합니다.




임해군이 적자 광해군이 서자인데 하지만 적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대충 얼마나 심했는지 이해가 가는부분이죠. 그래서 둘째인 광해군에게 물려주는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정식부인이 생기죠? 개족보가 탄생하는데 인목왕후는 광해군보다 나이가 10살이상 어렸었고 그당시 자식인 영창대군이 왕의자리를 물려받았어야 하나 당시 광해군의 세력이 있었고 영창대군을 보호하고자 아마도 광해군에 왕의 자리를 물려주었습니다. 본처의 자식인 영창대군과 후궁의 자식인 광해군이 왕의자리를 두고 선택이 되는데 2살짜리와 30살 이상의 어른이 왕좌를 두고 싸워야 했었습니다. 



드라마,영화의 소재로 자주 쓰이는 광해군


불안한 광해군의 세자생활


광해군의 아버지인 선조는 왕이 될수가 없는 사람이었으나 운으로 왕이된 케이스기 대문에 왕이되어서 컴플렉스가 상당히 심했다고 전해집니다. 후에 왕은 적자가 왕이 되어야 겠다는 심리적인 생각이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에 선조는 임진왜란때 광해군이 전란을 수습한것을 인정하지 않았을 정도로 광해군을 좋아하지 않았던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렇게 세자생활은 불안정했습니다. 아마도 광해군도 스트레스가 심했을 것으로 예상이 되네요. 선조가 죽자 인목왕후에서 인목대비가 되며 광해군을 울며 겨자먹기로 왕으로 책봉했으며 세자때부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지 심리적인 불안함으로 왕권강화를 주장했습니다.



광해군 과거 저평가의 원인! 역사적 최대 실수


보통 역사를 보면 불안한 지위때문에 정적들을 제거하는 방법과 포용하여 설득하는 방법이 있는데 제거하는 방법은 광해군의 예이며 후자는 정조 정도로 예를들 수 있습니다. 광해군 첫번째 실수는 친형인 임해군을 귀향보내서 죽여버린 것입니다.명나라는 이것이 이상하여 수사를 하게 되는데 이미 임해군이 귀향간 상태였으며 많은 은으로 뇌물을 주어 보내 수습했습니다. 이때부터 중국에서 사신을 보내면 꼭 뇌물을 주는 안좋은 예가 생겼다고 합니다. 친형을 죽이고 왕에 오른것이 첫번째 실수 였으며 두번째 실수는 영창대군이 왕위준비를 한다는 소문을 빌미로 강화도로 유배보내게 되는데 방에 계속 불을 넣어 영창대군이 방에서 방방뛰어다녔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렇게 방에 불을 때어 쪄죽이다 싶이 했는데 아마도 배후는 대북정권의 이이첨이 그랬다는 설이 있습니다. 설마 강화도부사는 아니였을것이고 배후는 아마도 이이첨이나 정인홍 정도가 아닐까 예상됩니다. 광해군이 직접 지시 했느냐 안했느냐 따지기도 하지만 어차피 광해군이 묵인했다는 결과가 나오니 뻔한 상황입니다. 추가로 폐륜입니다. 영창대군의 어머니이이자 광해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위시킨 일입니다. 지금도 어머니를 건드리지 않는것이 인지상정인데 조선시대에 어머니를 폐위시켜 역사에 남는 폐륜의 발자취를 남기게 됩니다.





광해군은 정말로 대동법에 힘을 실어줬을까?


광해군은 원래 대동법의 반대론자의 성격을 띕니다. 원래는 이원익이 주장한것이 대동법이었는데 이원익은 영창대군의 역모에 엮여 실각당하자 폐지를 주장하였고 결국 대동법이 확산되는것을 광해군은 경기도로 제한하였습니다. 결국엔 확산되는것을 막았던사람이었고 지방에서 공납을 끌어다 궁궐건축을 하였는데 이것에 차질을 받을까봐 대동법을 막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광해군이 폐륜으로 일컽는 왕이 되어버린것은 알고보면 문제가 있는 왕이라 봅니다. 임진왜란때 선조는 의주에 박혀있고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지휘하며 전란을 수습했던것으로 보아 인재였던것은 인정해야할 부분이지만 폐륜을 저질렀던 광해군은 후대까지 폐륜의 아이콘으로 불리고 있다가 얼마전 영화 광해때부터는 재평가되고 있습니다. 어차피 재평가 한다고 하지만 의동생을 죽이고 친형을 귀향보내 죽여버리는 임금은 아마도 정상적인 임금은 어떻게 보면 인조반정때 제거되지 않았어도 제대로 업무수행을 못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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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4.29 11:46 신고 BlogIcon 에스델 ♥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광해군에 대한 이야기가 참 흥미롭습니다.
    그래서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로 많이 등장하는것이겠지요? ㅎㅎ
    좋은 시간 보내세요!



어릴적 전래동화로 오성과 한음 이야기를 들은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어떤 이야기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우애가 좋은 친구였다는 기억만 남아있습니다. 오늘은 기억도 되심을겸 광해군의 폐륜정치에 저항했던 한음 이덕형에 대해서 포스팅해봅니다.


오성과 한음?


오성은 이덕형과 과거장에서 만난 이항복을 말합니다. 이항복은 이덕형보다 5살이 많으며 이항복의 작위명이 오성부원군이었기 때문에 오성으로 불리게 되었고 한음은 이덕형의 호가 한음이기 때문에 한음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전래동화에 보면 어릴적부터 서로 사귀어 친해졌다는 이야기는 잘못 알려진 이야기 입니다. 이덕형의 후손 이명교의 말에 의하면 승정원일기에 오성이 다섯살 많다고 기록으로 남겨져있습니다. 남들보다 빠르게 친해지고 마음이 잘맞았던것으로 예상이 되는 부분이며 본모습보다 민간이야기에서 우애가 좋다는것이 알려져있던 것으로 보아 나이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별한 우정을 나눈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한음 이덕형의 출생은?


한음 이덕형은 1561년에 지금의 남대문 근처인 한성 성명방이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영의정인 유전의 누이동생이었으며 외동아들로 태어났으며 머리가 똑똑하고 지혜롭고 글을 잘 쓰기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유명한 옛 인물들을 보면 거의 한결같은것이 어릴적부터 영특하고 지혜로웠다는것은 한결같은것 같습니다.한음 이덕형을 만난 사람들은 뛰어난 문장과 인품에 감동을 받았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글솜씨와 인간됨은 대단했던것으로 생각됩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엄친아라고 집도 잘살고 머리도 좋은 엄친아가 잘 어울렸을것 같습니다. 큰외삼촌이 영의정이었으니 집안은 볼것도 없겠네요.


세명의 이씨 인재를 알아본 율곡이이


20세에 우수한 성적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대제학이었던 율곡 이이에게 눈에띄어 홍문관정자가 되었습니다. 이때 세명의 이씨가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를 하였는데 그것이 오성 이항복과 이정립이었습니다. 이 세명의 급제동기는 나란히 호당에 들어가 홍문관의 직책에 배치되어 벼슬길대로를 달리게 되는것이죠. 후에 박사,수찬,교리,이조정랑에 이어 당상관,동부승지,대사간,부제학,대사성,이조참의,예조참판으로 31세?에 나이에 대제학에 오릅니다.


자고일어나면 직급이 달라져있더라!


선조때니까 임진왜란을 겪은 세대로 임진왜란때는 유성룡,이항복을 도와 전략을 짜내어 국가적 위기를 모면하는데 도우미 역할을 했으며 명나라 사진으로 원군요청에 성공했고 이항복과 함께 군사정책을 수행했습니다. 이후 의정부좌의정에서 도원수 그리고 41세에 영의정이 되었습니다. 임진왜란때 호성공신,선무공신에 추천되었으나 본인이 사양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광해군 정권의 저항 징비록의 이덕형


한음 이덕형은 대북파의 탄핵에 몰려 물러났는데요. 경기도 양근근처에 기거하였으며 영창대군과 인목대비 폐모론을 강하게 반대한 이유였습니다. 광해군때 영창대군이 처형되었는데 이에 극렬이 반대하며 상소를 올렸으나 그런 이유로 모든 관직에서 삭탈되었고 후에 병이 악화되어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서애 류성용이 기록했던 징비록에도 이덕형은 등장하는데 징비록에 보면 오성 이항복과 죽마고우였고 과거에 급제 그리고 우에 기록된 벼슬들 그리고 정유년에 왜군이 재침있댔다는 정유재란에서 전후의 사태를 수습하였고 영의정에 올라 광해군에 영창대군 처형과 폐모론을 반대하다 사직하고 국사를 걱정하다 병으로 운명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맺으며


어릴적 전래동화로 들었던 오성과 한음보다는 역사적 사실로 볼때 나라의 전란을 수습하고 불의에 반대한 이런부분들은 전래동화로만 아른거리던 한음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로 기억될것 같습니다. 한음 이덕형에 대해서 포스팅한김에 아이들에게 오성과 한음 책을 구해서 이야기를 들려줘야겠습니다. 당대 최고의 문인이었던 한음 이덕형 항상 나라를 걱정했던 이분은 다른 위인들과는 틀리게 유명하지 않았던 마치 축구스타인 박지성의 플레이처럼 팀을 위해 조용히 뛰어다니는 그런스타일이 아니였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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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4.23 16:58 신고 BlogIcon 마니737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 이야기 잘 읽고 갑니다~
    임란 전후에 우리가 아는 역사적 유명 인물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어쩜 너무 자주 언급되다보니 더욱 유명한 인물들이 되었을 수도 있지요.ㅋㅋ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저는 또 출장을 떠나니 다음 주에 찾아 뵐께요~~



요즘 한창 재평가 되고 있는 광해군에 대해 간단하게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서인 세력을 등에 업은 인조는 광해군이 명을 배신하고 동생을 죽였다는 이유로 반정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것이 인조반정인데요 인조반정을 일으킨 세력이 내세운 서른가지 이상되는 명분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광해군이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저버렸으니 바로잡는다는 의미의 '친명배금' (명나라와 친목을 도모하고 금나라와 멀리한다.) 이었고 두번째는 선조의 정비인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그의 소생인 영창대군을 살해하여 인륜을 어겼다는 것 하여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번째로 이야기한 친명배금은 갔다 붙이기 식의 주장이었습니다. 명분도 없고 실리도 없는 주장인데 어차피 명이든 후금이든 다른 나른 나라를 위한다는 것은 모두가 사대주의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광해군이 후금과 가까이 했다고 해서 후금을 사대했다고 볼 수 는 없는것이죠. 광해군은 명과 후금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기 위해 가장 노력했던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후금과 싸우던 명의 요청으로 파병할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지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비밀 교지를 내려 후금과 대적하지 말고 시세를 보아 판단하라고 명합니다. 그 이후에도 광해군은 계속 중립노선을 유지하게 됩니다. 이런것을 보아 명분도 실리도 없는주장이 인조반정의 주요 명분이었던 첫번째 친명배금의 주장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근본적으로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정책이었고 당시 명이 기울고 청이 새롭게 떠오르는 당시 상황에서 광해군은 외부와 최대한 충돌을 방지하고 나라의 내실을 다질 수 있는 일에 노력했던 것입니다. 후에 광해군은 위협세력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폭군으로 평가받아왔지만 임진왜란의 전란 복구와 민생안정에서는 누구보다도 최선을 다한 군주로 재평가 받고 있습니다. 





요즘 광해군과 인조반정에 대한 글들을 보게되면 인조반정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이야기들을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사망도 요즘 다뤄지고 있는데 인조반정이 일어나지 않고 후에 소현세자가 죽지 않고 왕이되었다면 하는 바램의 글들도 여럿보았습니다. 조선사에서 가장 최악의 군주인 인조가 왕이 되지 않고 광해군과 소현세자등의 애민을 중시한 사람들이 왕이 되었다면 아마도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현실에 변화가 있었을지 아니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는 바램들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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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검정은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으나 세검정도를 보고 다시 복구되었습니다.


인조반정과 홍제천


홍제천은 서울 종로구 평창동,구기동을 지나 홍제동, 남가좌동, 성산동을 거쳐 한강으로 흘러가는 하천 홍제천(弘濟川). 삼각산(북한산)의 수문봉, 보현봉, 형제봉에서부터 흐르는 물줄기가 소담하게 흐르는 서울 서대문구의 자랑이자, 동네 주민들에겐 언제나 친숙하게 만날 수 있는 산책로이자 자전거 길이자 서울 시민들의 쉼터입니다. 이 홍제천에는 역사적 이야기가 숨쉬고 있는데 바로 모두가 알고있는 인조반정때 이귀,김유등이 모여 광해군 폐위를 모이하고 칼을 씻어 목숨을 걸고 인조반정의 결의를 맹세하였다고 하여 누각이름이 세검정으로 지어졌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홍제천 병자호란의 슬픈사연


조선 최고의 무능한 왕으로 평가되는 인조때 일어난 병자호란과 홍제천이 관련이 있습니다. 조선의 슬픈역사인 병자호란과의 관련은 청나라에 공녀가 섞인 50만명의 백성들을 보내는데 이후 가족들이 몸값을 치뤄 다시 돌아오게 되나 사람들 중에 부녀자가된 여자들이 정절을 잃었다 하여 환향년 취급을 받으며 사회적 이슈가 되어 인조는 이사람들을 홍제천에 몸을 씻게하고 앞으로 환향년 취급을 할 경우 국가적인 처벌을 내릴것이라 명한 슬픈사연이 있는 것이 바로 홍제천입니다.



현재 세검정의 모습



인조반정의 재해석


인조반정에 대해서 예전에는 광해군이 폭군의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에 쫒겨나도 당연했던 왕으로 전해졌습니다만 요즘은 평가가 틀립니다. 수능에서도 잘 다루는 내용이고 많은 사람에 의해서 재해석되어 요즘은 광해군을 몰아낸 사건이며 당파싸움의 결과라는 평으로 바뀌는 분위기 입니다. 먼저 반정이란 의미를 아는것이 중요합니다. 실패하면 반역,역모가 되었을텐데 반정이 되었군요. 반정의 의미를 살펴보면 반정이란 중국의 춘추공양전에서 유례되어 잘못된것을 되돌린다는 뜻입니다. 연산군때 중종반정이 있었으며 광해군때 인조반정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승자에 의해서 역사는 쓰여지기 때문에 반정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정의감에 불타는 사람들이 있어서 안될 사람을 끌어내리는 그런 정의로운일을 한다는 내용이 정의가  될 것 같네요.


왜 하필 능양군이었을까?


능양군이 처음부터 모의를 했기 때문에 성공하면 왕좌에 앉을 분위기였던게 가장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선조 큰아버지가 광해군인 능양군은 성격이 말수가 적고 조용한 편이며 선조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인조실록에는 하루종일 한마디도 안했던적도 있었다고 적혀있는것으로 보아 정말 말수가 적었을 것이라 예상이 됩니다. 어떻게 보면 주변사람들은 무서웠을 정도로 쉽지 않은 위엄이 있는 왕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신체적인 특징도 적혀있는데 허벅지에 많은 사마귀가 있었다고 하는데 인조행장에 보면 선조께서 기이하게 여겨 '이것은 한고조와 같은 상이니 누설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전해집니다. 이런 것으로 짐작하건데 선조의 사랑이 광해군과는 차별되었다고 예상되는 부분입니다.



역사의 치욕 드라마 꽃들의 전쟁의 인조


광해군의 탄핵 죄목은?


36개의 죄목을 두고 인조반정의 명분을 설정하는데 외교정책,폐모살책,토목공사등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현실의 형법에 비교해보면 죄가될 수 있는것이 없고 모두가 명분정도가 될 정도 뿐입니다. 이것을 계기로 조선의 전기와 후기를 나누며 성리학적 명분사회가 수립되어가는 획을 긋게 되는데 이후에는 성리학적 윤리를 강조하는 국면으로 조선이 나아가게 됩니다.


인조반정을 눈치채지 못하게 눈과 귀를 막는 상궁 김개시


광해군과 선조의 신임을 받았던것이 상궁 김개시라고 전해지는데 고변을 잠재운게 김개시라는 것은 사실이라고 합니다. 소위 왕의 안테나로 왕들에게 소식을 전해주는 역할을 하여 환심을 샀던것으로 보아 전문적인 비서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는데 궁중의 일들이 모두 김개시에게서 나왔다고 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드라마 서궁의 김개시 역에 이영애씨 이것이 나이가 들어도 피우지 않은 외모인가?


고변을 알아채고 광해군에 눈과 귀를 막아 인조반정을 수습하는 역할을 했지만 인조반정이 일어난 바로 그날에 처형되어 일부로 눈과귀를 막은건지 아니면 모르고 있었던 것인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예상만 있는 상태입니다. 김개시가 미모가 뛰어나 미인계로 홀렸을 가능성이 있지만 기록에는 '나이가 차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다' 라는 기록이 있어 미인계가 아니라 출중한 지략으로 왕들과 정치인들에 탄력적인 중계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예상됩니다. 예전에 드라마에서는 뛰어난 용모의 배우가 미인계로 왕을 홀리는듯한 뉘앙스로 방영되긴 했으나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어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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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4.16 20:12 신고 BlogIcon 에스델 ♥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홍제천은 예전에 자주 산책하던 곳이라~
    방갑게 느껴집니다.^^
    요즘 광해군이 나오는 소설을 읽고 있는
    중이어서 김개시에 더욱 관심이 갑니다.ㅎㅎ
    편안한 저녁시간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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