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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공간과 남북분단


오늘은 우리나라의 분단역사를 간단하게 정리해보는 포스팅을 해봅니다. 모두다 아시듯 1945년 8월 15일에 일제는 미국의 전쟁개입으로 패망하고 무조건 항복 선언을 하였습니다. 당시에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단체로는 상해의 임시정부와 국내의 건국동맹정도였습니다. 새로운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많이 부족한 상황이었죠.


여운형은 해방직후에 건준위라 불리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건국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전국 145개 지역에 치안대를 설치하고 9월6일에는 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습니다.


여운형


인민공화국은 새로운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국이 인정하지 않는 조직이었으며 민족주의 우파들도 탈퇴한상황이었고 상해정부의 김구 주석이 참여하지 않았으며 조선공산당을 재건한 박헌영이 참여하면서 좌익일변도의 조직으로 전락되어 급격히 세력이 약해졌습니다.


하루뒤인 9월7일에 남한에 있던 미군 중장 하지는 군정을 선포하였는데 이것은 친미정부를 세우기 위함아었습니다.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김구의 상해정부를 배제한 채 한국민주당을 우군으로 끌어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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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과 남북분단의 역사


두달뒤인 11월3일에 김구 주석이 개인자격으로 국내에 들어오자 국내정치세력은 우파인 한민당,좌파인 조선공산당, 중도파인 한국독립당,안재홍의 국민당,여운형의 조선인민당으로 나뉘어져 과도 정부수립을 위한 노력을 쏱고 있었습니다.





이러던 둥 1945년 12월에 미국,소련,영국 외상들이 모스크바에서 3상 회의를 열고 한국문제에 대한 4개항의 결의서를 채택하였는데 이를 신탁통치안이라 부릅니다. 이 결의한에 따라 한국은 5년동안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를 받아야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때부터 좌우익이 신탁과 반탁으로 갈라져 격렬하게 대립하였습니다.


미국과 소련은 신탁통치안을 실천하기 위해 1946년 3월과 1947년 5월에 두차례에 걸쳐 미소공동위원회를 덕수궁 석조전에서 개최하였지만 결론은 쉽게 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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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남한 내 우익의 일부가 단독정부를 수립하자는 주장을 하자 남북분단을 우려한 사람들은 남북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한 좌우합작운동을 벌여나갔습니다. 1948년 4월19일에 김구는 3.8선을 넘어 평양으로가서 남북 56개 정당, 사회단체 대표 695명이 참가한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여해서 단독정부 수립을 막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좌우합작운동은 미국의 반대와 남한 내 단독정부 수립파들의 권력욕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고, 5월10일 유엔의 감시아래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치루어졌습니다. 평양에서는 6월에 별도로 최고인민회의가 개최되어 독자적인 정부구성을 준비하는등 1948년 6월부터 남북한은 분단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참고 : 단숨에읽는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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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윤봉길의거 그리고 김구의 한인애국단과 상해사변 이야기

상해사변 전승기념식

1920년대는 여러사건으로 인해 무장투쟁이 크게 약화되고 있었습니다. 상해임시정부가 여러계파의 분열로 자기 역할을 하지 못하자 테러를 통한 독립투쟁이 일어났습니다. 1919년 김원봉은 테러무장조직인 의열단을 조직하고 단재 신채호는 1923년에 이 단체의 행동강령인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였습니다. 의열단은 민중들이 직접 폭력혁명으로 일제를 무너뜨리고 민중정부를 세운다는 목표아래 1920~21년에 부산,밀양,종로등의 일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몇년후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조선식산은행,조선총독부에 권총을난사하여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습니다.



의열단은 1920년대 후반부터 조직적인 투쟁으로 전환하면서 무장투쟁의 역량을 걍화하는 방향으로 노선이 바뀌었습니다. 1931년 9월18일에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동북지역을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꼭두각시 정부인 만주국을 세워 독립군을 만주에서 몰아내는 한편 중국 북부지역으로 군사역량을 결집하였습니다.


윤봉길의사의 도시락 폭탄으로 인한 피해모음


이로써 만주지역의 무장투쟁은 거의 힘을 상실하였고 독립기지를 잃은 상해임시정부는 중국 내에서 고립되거나 조직이 와해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김구는 임시정부 내에 비밀결사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1931년 12월 13일에 이봉창으로 하여금 일왕을 처형케 하였습니다. 하지만 1932년 1월8일에 이봉창은 동경에서 일왕을 향해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처단에는 실패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거대한 중국인의 잠자고 있던 대일적개심을 촉발시켰으며 한중 양국의 공동의 적이 일본임을 대니외에 알린 쾌거로 의미가 있습니다.




이봉창 의거 후 일제는 1월 8일에 일본거류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해군을 파겨하여 중국 상해를 점령한 이른바 상해사변을 일으켰습니다. 일제는 상해의 한국 독립 세력을 뿌리뽑으려 했지만 국제적인 비난이 가해지자 상해철수를 단행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일본군은 일왕의 생일인 4월29일 천장절에 상해전승축하식을 홍구공원에서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국민군인 19로군


상해사변이란?


상해사변은 상하이 사변이라고도 불리는데 중국과 일본의 중요한 군사적 충돌이었습니다. 1937년에 발발한 중일 전쟁의 전초전 성격을 지닌 전투로 중국에서는 1월 28일날 일어난 사건이라고 해서 일이팔사건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전투는 중국의 19로군이 상해방어진지에서 여러번의 일본군의 공격을 모두 방어하며 당황케만든 전투였으나 3월1일이 되자 잘 방어해오던 상해를 버리고 모두 철수를 시작하며 일본에게 상해를 점령하게 하는 사건으로 갑작스런 철수에는 청나라 숙친왕의 딸인 금벽휘라는 여인의 농간에 놀아났다느 ㄴ설이 있습니다. 일본군에 의해 거직정보를 중국군에흘려 철수를 유도했다고 하여 후인 1928년에 장제스에 의해 총살됩니다.



김구는 윤봉길과 협의하여 중국군에 있던 김홍일 장군에게서 도시락 폭탄 2개를 입수하였는데 윤봉길이 던진 도시락 폭탄은 중앙연단에서 터져 상해침략군 사령관 시라가와 육군대장,상해거류민단장 가와바다를 즉사시켰으며 해군 3함대사령관 노무라 중장은 실명하였습니다. 9사단 우에다 육군중장과 주중공사 시게마쓰는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이 사건으로 상해임시정부는 프랑스 조계를 떠나 중경으로 피신하는 대장정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 참고서적 : 단숨에 읽는 한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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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1주년 기념사진


좌우합작운동과 신간회사건에 대해서 궁금해서 알아보도록 합니다. 신간의 활동이란 1927년 2월 15일에 서울 종로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250여명이 창립한 신간회는 사회주의계열 기독교계,언론계,천도교계,불교계 등이 참여한 우리나라 최초의 좌우합작 운동이며 민족유일당 운동의 첫걸음으로 평가됩니다.


해외에서 상해임시정부와 무장단체의 항일운동이 격렬하게 진행되고있을때 국내에서는 일제의 문화통

치에 회유되어 이른바 실력양성론자들의 변절이 잇따랐습니다. 





본래 실력양성이란 민족경제의 확대 교육계몽운동,물산장려운동,민립대학설립,우리말 사용 등 내적 역량을 키우고 독립을 추구하는 비타협 운동이었지만 192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최남선,이광수 등 대표적인 실력양성론자들은 민족개조론과 자치론을 내세우며 일제와 타협하였습니다.


6.10만세운동의 촉진제가 되었던 순종의 장례식 장면


이런 가운데 1917년의 러시아혁명은 한국의 사회주의운동에 불을 당겼습니다. 일제를 몰아내려는 민족해방과 지주계급을 무너뜨리고 평등을 실현하려는 계급혁명은 조선사회에서 지식인들에게 매력적인 이념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1923년의 신사상연구회, 1924년의 북풍회,화요회 등이 조직되고, 1925년에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가 조직되었습니다. 1926년에 좌익은 순종의 장례식에 대규모의 6.10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일제의 문화정책과 회유정책으로 민족세력은 사분오열되고 우파민족주의자들의 실력양성운동은 일제에 빌붙은 타협주의자로 낙인찍히고 사회주의 계열은 6.10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가 탄압받아 조직이 무너지기 직전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세력과 온건좌파들이 이념적으로 중도적인 중앙당,민족유일당을 건설하여 민족운동을 결집하고자 시도하였습니다.


EBS 광주학생항일운동과 신간회의 관계


좌우합작운동은 1925년에 결성된 조선사정연구회와 1926년에 조직된 정우회로 나타났고 이것이 확대되어 1927년 2월에 신석우,안재홍,홍명희,문일평등 민족주의 계열과 이갑성,이승훈 등 기독교계 권동진 등 천도교구파, 한용우등 불교계, 공산당원 한위건등 28명의 발기인에 의해(신간회 회장 이상재,부회장 홍명희)가 결성되었습니다.


신간회 운동은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회를 개최하고 조선인에 대한 착취기관의 철폐, 일본인의 조선이민 반대, 타협적 정치운동배격,조선식 교육의 실시,사상연구의 자유등을 주장하였습니다. 신간회운동은 1929년 6월에 민족좌파인사인 허헌을 집행위원장으로 하는 대규모의 민중대회를 추진하였습니다. 특히 신간회는 원산노동자 대파업,단천의 농민운동, 1929년 11월 3일에 일어난 광주학생의거를 배후에서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신간회는 1930년대에 이르러 김병로등 일부 간부진들이 자치운동에 합류하고, 사회주의 계열은 소련의 코민테른이 지시한 민족세력과의 분리투쟁을 받아들여 신간회의 해체를 원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신간회는 1931년 5월에 자진해산하면서 민족세력과 사회주의세력의 첫 번째 좌우합작운동은 아쉽게도 끝을 맺고 말았습니다.(참고서적 :  단숨에 읽는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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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대승을 거뒀던 청산리전투의 승리내용과 청산리전투로 인해 경신참변(간도학살사건)을 겪은 이야기를 포스팅해봅니다. 청산리전투의 대승은 멋졌지만 이를 계기로 잔혹한 학살사건을 이끈일본군의 만행을 다루었습니다. 아프고 잔인한 역사를 겪었던 일제강점기 시대를 되돌아보고 곱씹어 역사를 본보기로 삼아보고자 글을 정리해봅니다.



1920년에 북간도와 서간도를 무대로 무장투쟁을 주도한 단체는 군정보, 대한군민회군,북로군정서,대한독립군,대한의용군,광복군총영 등이 있었습니다. 이들 무장독립단체는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다들며 일본군과 교전하였는데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전투가 1920년 6월부터 10월까지 벌어진 청산리전투였습니다.



청산리전투는 1920년 6월에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이 주축이 되어 치룬 봉오동전투와 1920년 10월에 김좌진,이범석이 이끈 북로군정서의 청산리전투를 말합니다. 홍범도는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 1개 대대를 맞아 대승을 거두었고 이어지는 일본군의 반격에 맞서 김좌진과 이범석은 청산리에서 일본군 1200명을 사살하고 2천여명을 부상시키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청산리전투는 청산리대첩이라고도 부른다. 김좌진,나중소,서일,이범석등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대한신민단 예하 신민단 독립군등 주축으로 활약한 만주독립군 연합부대가 만주에 있는 지린성 화룡현청산리 백운평,천수평,완루구 등지의 10여차례에 간도에 출병한 일본제국 육군과 전투를 벌인 총칭을 청산리전투 혹은 청산리 대첩이라고 합니다.



청산리전투의 대승은 일본이 중국에 압력을 행사하여 독립군을 해체의 위기로 몰고가게 되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일제는 청산리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고 독립군기지를 뿌리뽑는 한편 아울러 간도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10월에 훈춘사건을 조작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일본군이 중국 마적단을 시켜 일본영사관을 습격케하고 그것의 죄를 한국인에게 뒤집어 씌워 간도지방에 살고있는 한국교포들을 학살하려는 음모였습니다.


일본군은 간도에 사는 1만여명의 동포를 학살하고 2500여채의 민가에 불을 지르고 30개동의 학교를 없앴는데 이를 경신참변 또는 간도학살사건이라고 부릅니다. 1921년 6월 28일 독립군부대는 일본군이 한인동포에게 가해지는 만행을 피하고자 소련과 만주의 국경지대인 밀산부로 모여 대한독립군을 조직하고 자유시로 이동하였습니다.



이때 소련군이 적군과 백군으로 나뉘어 싸우는 가운데 적군파는 일본군의 개입을 막기 위해 일본군과 밀약을 맺고 대한독립군을 무장해제 하고 수많은 독립군을 학살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독립군 초기조직이 무너지면서 대일부장투쟁의 무력은 급격하게 쇠퇴하고 이로부터 무장 항쟁은 일대 좌절을 맞았습니다. 경신참변에 잔인하게 죽은 조선인이 1만으로 구글에서 경신참변으로 조회하면 수많은 잔인한 사진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잔인한 장면을 블로그에 담을 수 없기에 한번 찾아보시고 그당시 잔인했던 전쟁을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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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관파천에 성공한 고종은 친일내각을 처어산하고 이완용,윤치호,이범진등을 주축으로 친러내각을 구성하게 된다. 친러 내각은 단발령의 취소,태음력의 환원,의정부 복구,내각제의 폐지등을 추진하였고 이시기에 자주권에 대한 열망으로 청의 지배권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해야한다는 여론이 있었다.




고종은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견제하면서 변법자강파를 물리치고 동도개화파를 등용하여 부국강병과 황제권위를 세우고자 하였다. 고종은 연호를 광무라고 하고 원구단에서 황제즉위식을 거행하고 나라이름 또한 대한제국으로 바꾸었ㅅ다. 헌법에 해당하는 9개조의 대한국 국제를 발표하는데 이른다.




황제의 군권장악과 국방력 강화를 위해 원수부가 설치되었고 무관학교가 설립되었다. 또한 근대적인 토지소유권을 위해 1898년에 양지아문이 세워지고 후에 토지조사사업이 벌어졌다. 고종의 황제즉위와 대한제국의 수립으로 시작한 광무개혁은 1904년에 일어난 러일전쟁과 1905년의 을사약으로 좌절되고 만다.



고종이 추진한 광무개혁은 여러가지 분야에 걸쳐서 시행된다. 황재가 육,해군을 직접 통솔하게 되었고 무관학교가 개걸되는등의 군사부분의 개혁이 있었으며 대외적으로는 대한국제가 반포되었고 훈장제도가 새로 생겼다. 사회및 경제부분에서는 홍삼을 장려화하고 황제직속기관으로 가져오면서 제조 및 관광사업을 황실재정수입이 증가하였으며 지계제도를 채택하여 토지문권을 발급하게 되었다. 



또한 상공업진흥에 힘썼는데 진흥책으로 한성은행,대한은행등의 금융기관을 설립하였으며 교육면에서는 실업교육위주의 체신사무 요원의 양성을 위한 우편,전무학당이 설립되었고 상공업학교와 의사양성을 위해서 경성의학교가 설립되었다. 그 이외에도 사법기관을 정비하여 여러가지 나라를 개편하기 위해 개혁을 하였으나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재진출함에 따라 중단되었다. 보수파에 의해 추진된 갑오,을미개혁을 답습한것이었으나 국가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지향하여 비교적 외세의 간섭없이 자주적으로 추진되었다는점은 중요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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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2.02 11:01 신고 BlogIcon 마니737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중요한 역사적 내용 잘 보고 갑니다~
    러시아, 청, 일본 등 저 시기에도 외세가
    우리의 여러가지 사건에 개입했죠!!!

    2월달도 힘내는 한달 되세요^^

  2. 2015.02.03 10:41 신고 BlogIcon 에스델 ♥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교적 외세의 간섭없이 자주적으로 추진된 개혁이란
    점에 의의가 있는 광무개혁이네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갑오개혁(1894)과 을미개혁(1895)의 의미는 갑오년에 시작해서 을미년에 개혁을 끝냈다고 해서 갑오,을미개혁이라고 합니다. 갑오개혁이 중요한것은 지금 우리가 하고있는 근대사의 의식주는 이 갑오개혁을 기준으로 모두 바뀌게 되었는데 일단 기존에 있던 모든 의식주의 방법이 이 갑오개혁을 기준으로 바뀌게 됩니다. 어떤내용이 바뀌는지 알아보겠습니다.일본에 간섭이 있었지만 자주적으로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과거시험이 사라지다


과거시험은 고려시대 광종때 시작되었는데 갑오개혁을 기준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의 시험은 형식적으로 변했으며 청탁에 의해 썩어빠져 갑오개혁때 시험을 없애게 됩니다. 이후에 공무원시험이 치뤄지게 되기는 합니다.



도량형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쓰는 단위가 지역별로 틀렸다고 합니다. 예를들면 보통 예전에 길이를 잴때 '한자'라고 하면 지방각지의 '한자' 의 크기가 서로 틀렸었다고 하는데 도량형을 퍼트려 동일한 단위를 사용하게 됩니다.



고문과 연좌법의 폐지


현재는 고문을 하지 않지만 예전에는 고문이 있었습니다. 단계별로 코스가 있는데 태형,장형,도형,유형,사형의 단계별로 벌하는 방법이 있었는데 이런것들이 갑오개혁 기준으로 바뀌게 됩니다. 원래 태형을 시작으로 나중에는 유배가면서 죽는 코스가 우리나라의 형벌의 코스였지만 갑오개혁이후는 고문에 해당하는 형벌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죠. 연좌법은 사돈에 팔촌까지 노비만들고 삼족을 멸하는것이 연좌법인데 이것또한 사라지게 됩니다. 크지는 않지만 인권을 바로 세우는 개념이 등장하게 됩니다.


조혼의 금지


조혼의 유례는 고려시대때 원나라에게 80년간 우리나라가 지배를 당하게 되죠. 이때 원나라인 몽골에서 우리나라 여자들을 잡아갔었는데 이때 잡혀가지 않는 방법으로 아주 어릴때 미리 결혼을 시켜 몽골로 대려가지 못하게 하는것이 유례가 되어 조혼이 성행하였다고 합니다. 이 조혼도 갑오개혁을 기준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은 지금 과거와 현재를 나누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입었었던 한복은 일반 옷과 정장으로 바뀌는등의 많은 변화가 일어나는 이정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랫만에 설민석선생님의 감오개혁과 을미개혁에 대한 설명을 듣다가 몇자 남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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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0.17 10:58 신고 BlogIcon 마니737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변화가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하겠죠~
    역사에 대한 지식들 잘 보고 갑니다^^



외국 사신의 접견이 이루어지던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고종황제(중앙)가 이토히로부미(고종의 왼편부터)와 이완용등 친일 각료에 둘러싸여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


반일정책 내각구성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을 청나라에서 빼았았고 요동반도(랴오둥반도)를 할양받아 만주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것에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 대한 간섭이 심해지는 계기가 되었고 고종은 미국,러시아등과 가까운 김홍집,김윤식,이범진,박정양,이완용 등으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여 반일정책을 펴나갔습니다.


후에 일본은 삼국이 간섭하여 요동반도를 잃었고 후에 남하하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벌이기에는 역부족이라 판단하여 1895년 10월 8일에 러시아와 가깝게 지내려는 명성황후를 낭인과 훈련대를 경복궁에 투입시켜 시해하여 친러시아파의 생명선을 끊는 을미왜변을 일으킵니다.  고종은 1895년 8월에 일본의 강요에 의해 김홍집을 내각수반으로 하는 제3차 김홍집 내각을 구성합니다. 나라에 힘이 없어 청에 휘둘리고 일본에 휘둘리다가 결국에는 명성황후까지 시해하는대까지 온것입니다.



이때 3차 갑오개혁의 내용 가운데 단발령은 전국에 있는 유생들과 백성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키는데 유생을 주축으로 국모의 시해에 대한 원수를 갚고 단발령의 주모자를 처벌하는 전국적인 의병전쟁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을미의병이라고 합니다. 일본군이 의병을 토벌하기 위해 한성을 비우게 되자 고종황제는 1896년 2월 11일에 경복궁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영토에서 청과 왜가 싸우고 거기에 러시아,독일,프랑스의 삼국간섭까지 하였고 일본에서 유리한 고지선점을 위해 명성황후를 시해하였고 후에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까지 주변국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나라로 한걸음더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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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때 강화도에 다녀오면서 들렀던 초지진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초지진은 강화도로 들어오는 바다 입구에 처음으로 만나는 포대로 형성된 진 입니다. 초지진의 위치는 김포와 강화도의 경계인 초지대교를 강화도쪽으로 김포의 대명항 바로 건너편에 있습니다.





초지진 이란?


초지진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에 있는 포대를 형성한 진으로 줄여서 초지진 이라고 합니다. 바다에서 들어오는 적을 막기 위해 만든 요새이며 1656년에 만들어졌습니다.





초 지진은 외세의 적들이 쳐들어오는 적에대해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곳인데요 프랑스가 쳐들어온 병인양요와 미국군대가 쳐들어온 신미양요때 활약했던 곳이었고 운양호와 포격전을 전개하여 거의 파괴되었지만 1973년에 초지진을 다시 복원하였습니다. 초지진에 가보시면 오래된 노송나무가 있습니다.



그 나무에는 당시 포탄을 맞은 자국이 나무에 새겨져 있는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현재는 복원되어 거의 새것처럼 복원되었으며 성곽안에는 2.5미터짜리 당시 사용하던 포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초지진 탐방기


초지진에 들리게 되면 꼭 왼쪽에 보이는 노송을 들러보시기 바랍니다. 저의 경우는 별거 없어보여서 안갔지만 초지진의 볼거리는 노송에 포탄자국입니다. 어차피 성곽도 다시 만들어놔서 예전것 같지 않아보입니다.

초지진은 앞에 보이는 성곽이 볼거리가 끝입니다. 저 성곽을 들어가려면 표를 사야 하는데 표값이 조금 아까운생각이 들었습니다만 700원 밖에 안하고 65세 이상은 무료 6세까지도 무료라서 표를 사서 구경해보았습니다.


초지진 입구에 설치되어 있는 신발이나 몸에 뭍은 흙을 제거해주는 장치 입니다. 어디 산에 다녀오시거나 바다근처에 갯벌때문에 흙이 뭍으면 제거하는 용도인것 같았습니다.


표 를 내고 들어가게 되면 앞에 둘레가 4,5백미터 정도로 보이는 작은 성곽이 보이는데 이것이 초지진 입니다. 외세에 열심히 최초의 선봉진으로 수호하다가 운양호때와 강화도조약쯤에 거의 박살이 난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외세에 침략에 대항하는 아이콘이라 생각이 되네요.


초지진 내부에가보면 가운데 실제 사용했다고 쓰여진 포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초지진은 앞에 보이는 초지대교를 건너자마자 우회전을 하면 조금 안가서 바로 찾으실 수 있습니다.

갯벌에 나간 사람들이 있는데 낚시를 하는것 처럼 보였습니다. 저분들을 위해서 신발 세척하는 장비가 설치되어 있나 봅니다.

초 지진을 둘러보고 넓은 바다에서 들어오면 만나는 이 요새는 정말 많은 시련과 고초를 겪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예전에 열심히 하던 게임인 스타크래프트에서 드래곤에 둘러쌓인 벙커로 생각이 되는데 이곳을 지키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보니 작지만 숙연해지는 곳이었습니다. 초지진을 뒤로하고 다른 포대인 덕진진도 한번 들러서 구경해보고자 덕진진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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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Orang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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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9.22 13:10 신고 BlogIcon 『방쌤』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학창시절 열심히 연도와 장군들의 이름을 외우던 기억이납니다ㅎ
    이렇게 사진으로 보니 이해가 더 빠르네요~
    e편한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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