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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선 역사

인조 능양군의 무능한 업적들과 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



인조 능양군은 어떤사람이었을까?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화정을 보면 권모술수에 능하며 왕답지 않고 무능해보이는 능양군이 실제 어떤사람이었을까 궁금했습니다. 실제 화정이라는 드라마에서 얼마나 역사에 가깝게 인조를 그렸는지도 모르는것이라 역사를 토대로 능양군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그리고 후대에 어떤일에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포스팅을 해봅니다.


광해군 역할의 배우 차승원씨

 

광해군을 폐위시킨 능양군의 인조반정은 인조를 추대하는 세력이 반정을 도모하여 인조가 왕위에 오르는것을 인조반정이라 합니다. 또다른 반정중 하나인 중종반정과는 반정의 성격이 약간 틀리다고 할 수 있는데요. 같은 반정이지만 반정을 도모한 무리들이 인재를 물색해 왕으로 추대하는것이 아니라 직접 반정에 깊히 관여하여 왕족인 본인이 왕위에 추되되는 반정이라는 것에 성격이 약간 틀립니다. 


 

왕의 위치에 오지 못할 사람이 그 자리에서 감투를 썼을때 후대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합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각자의 직장인 회사에서도 능력이 되지 않는 사람이 상사의 자리에 있으면 아래 실무자 혹은 직원들이 상당히 일하기가 힘들어지는 이치와 같습니다. 조선 최악의 왕으로 꼽히는 3대왕중에 인조를 무능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을정도인데 그런 인물이 왕이 되었기 때문에 후에 조선백성들과 조선의 불운도 함께하게 됩니다.




 

광해군은 금,명나라와 중립적 외교를 펼쳐 양국을 저울질하는 역할을 했지만 인조의 경우는 한쪽으로 치우친 친명배금의 외교정책을 펼쳤습니다. 명나라와 친분을 도모하고 금나라를 배척하는데 문제는 금나라의 후손들인 여진족들이 후금을 만들어 힘이 강해지기 시작하게 되는 시기였습니다. 화정에서 보면 광해군이 강해지는 후금을 두고 심사숙고 하는 장면이 여러번 나오는데 이때 중국 배경이 명나라가 후금에 밀리기 시작하게 되는 시점입니다. 그리고 후금이 명나라의 멱살을 잡고 흔들정도로 힘을키운 후 청나라로 국명을 바꾸게 됩니다. 그리고 인조의 조선을 질근질근 밟아주게 되는거죠. 명분에 사로잡혀 병자호란을 부른것이 됩니다. 



드라마 꽃들의 전쟁의 삼전도로 향하는 인조

 

병자호란에서 청나라에 심각하게 밟히는 이유는 무능한 정부의 외교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명나라와 청나라의 힘의 차이를 읽지못했던것이 가장 큰 원인이며 최초 후금은 4만명의 병사를 끌고 쳐들어왔지만 명과의 관계 때문에 조선과 형제의 관계를 맺고 돌아가지만 후에 명나라를 짓밟은 후에 16만대군으로 다시 쳐들어옵니다. 4만도 이기지 못하는 조선에 15만의 대군이 청의 이름으로 바꾸고 형제의 협약 업그레이드인 군신의 관계를 요구하자 인조가 발끈하며 전쟁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전국에 격문을 보내 청의 공격에 대비하라는 지시를 합니다. 도대체 뭘 믿고 발끈 했는지는 이해할 수 가 없는 부분입니다.

 

광해군의 경우 국제정세를 읽어 중립외교를 했었지만 임진왜란을 명이 도와줬다는 이유로 광해군에 반기를 들어 인조를 왕으로 세워 반정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죠. 그 인조반정이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된것이었습니다. 그당시 동아시아의 정세는 명,청 교체기였는데 국제정세를 읽지못한 조선왕조의 문제가 치명적이었습니다. 솔직히 개인적인 생각으로 인조가 아무리 무능한들 명나라와 청나라 어떤 나라가 대세로 가는지 몰랐을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왕 보다는 그를 추대한 추대세력간에 문제가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전국에 격문을 보내 청에 공격에 대비하라는 이야기를 들은 청의 홍타이치는 16만에 4만을 보태 20만으로 남한산성으로 쳐들어가 둘러싸버리고 도망갔던 인조의 가족들까지 싹다 잡아와 항복을 요구하고 군사도 군량도 없는 인조는 항복을 결정하게 됩니다. 항복을 결정을 했으면 대가가 있어야 겠죠? 50만명의 부녀자가 명으로 끌려갔고 그때 살아돌아온 여자들을 화냥녀라고 불렀습니다. 보통은 냉대와 멸시를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끝내 살아서 돌아온 여자들도 목을 메거나 매춘으로 살아가는 비참한 생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추가로 삼전도의 굴욕이 있는데 원래는 청나라에서 반합을 요구했습니다. 반합은 항복을 하는 의식같은것인데 죽은사람처럼 구슬을 물고 빈관과 함께 손을 묶은채로 항복을하는것입니다. 간신히 설득하여 삼배구고두래로 협의를 보게됩니다. 삼배구고두례는 여진족의 풍습으로 한번절할때 세번 이마를 땅에 찍는 풍습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세번했고 처음에 이마를 살짝 찍어서 몇번 더했다는 속설이 전해집니다.


드라마에서 인조의 삼전도의굴욕

 

고려때는 원나라에 항복해 고려가 복속되는 개념이었는데 청나라는 항복을 받고 대가를 받은뒤 조선을 자유롭게 놓아줍니다. 아주 자유롭지는 않았지만 항복하는 개념에서는 자유롭다고 할수 있었습니다. 인조 뒤를 이은 효종이 더욱더 이를갈고 북벌을 준비 했지만 힘의 차이때문에 시작도 못했습니다.




 

대한민국의 2대 국가치욕 중 하나인 병자국치는 위에서 이야기 한 남한산성에서 혹한속을 걸어 송파나루에 있었던 삼전도까지 와서 치욕을 당했으며 항복을 기념하고자 세워진 대청황제공덕비인 삼전도비를보며 부끄럽지만 잊지 말아야할 역사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인조는 이후에도 멈추지 않고 유능한 소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가는등에 무능한짓을 하며 조선을 더욱더 암울한방향으로 몰고갑니다. 요즘 광해군의 재해석이 되면서 인조도 새롭게 무능한 왕으로 비교되고 있는가운데 중요한것은 역사를 보며 부끄럽게 여기고 잊지 말아야할 기억으로 삼고 되풀이되지 않는길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좋은 본보기라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