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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근대 역사

6.25 전쟁과 남북분단의 역사 -1- (대한민국 건국 준비)


해방공간과 남북분단


오늘은 우리나라의 분단역사를 간단하게 정리해보는 포스팅을 해봅니다. 모두다 아시듯 1945년 8월 15일에 일제는 미국의 전쟁개입으로 패망하고 무조건 항복 선언을 하였습니다. 당시에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단체로는 상해의 임시정부와 국내의 건국동맹정도였습니다. 새로운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많이 부족한 상황이었죠.


여운형은 해방직후에 건준위라 불리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건국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전국 145개 지역에 치안대를 설치하고 9월6일에는 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습니다.


여운형


인민공화국은 새로운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국이 인정하지 않는 조직이었으며 민족주의 우파들도 탈퇴한상황이었고 상해정부의 김구 주석이 참여하지 않았으며 조선공산당을 재건한 박헌영이 참여하면서 좌익일변도의 조직으로 전락되어 급격히 세력이 약해졌습니다.


하루뒤인 9월7일에 남한에 있던 미군 중장 하지는 군정을 선포하였는데 이것은 친미정부를 세우기 위함아었습니다.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김구의 상해정부를 배제한 채 한국민주당을 우군으로 끌어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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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과 남북분단의 역사


두달뒤인 11월3일에 김구 주석이 개인자격으로 국내에 들어오자 국내정치세력은 우파인 한민당,좌파인 조선공산당, 중도파인 한국독립당,안재홍의 국민당,여운형의 조선인민당으로 나뉘어져 과도 정부수립을 위한 노력을 쏱고 있었습니다.





이러던 둥 1945년 12월에 미국,소련,영국 외상들이 모스크바에서 3상 회의를 열고 한국문제에 대한 4개항의 결의서를 채택하였는데 이를 신탁통치안이라 부릅니다. 이 결의한에 따라 한국은 5년동안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를 받아야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때부터 좌우익이 신탁과 반탁으로 갈라져 격렬하게 대립하였습니다.


미국과 소련은 신탁통치안을 실천하기 위해 1946년 3월과 1947년 5월에 두차례에 걸쳐 미소공동위원회를 덕수궁 석조전에서 개최하였지만 결론은 쉽게 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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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남한 내 우익의 일부가 단독정부를 수립하자는 주장을 하자 남북분단을 우려한 사람들은 남북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한 좌우합작운동을 벌여나갔습니다. 1948년 4월19일에 김구는 3.8선을 넘어 평양으로가서 남북 56개 정당, 사회단체 대표 695명이 참가한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여해서 단독정부 수립을 막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좌우합작운동은 미국의 반대와 남한 내 단독정부 수립파들의 권력욕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고, 5월10일 유엔의 감시아래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치루어졌습니다. 평양에서는 6월에 별도로 최고인민회의가 개최되어 독자적인 정부구성을 준비하는등 1948년 6월부터 남북한은 분단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참고 : 단숨에읽는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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