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근대 역사

의병전쟁과 명성황후 시해 그리고 고종 황제의 아관파천


외국 사신의 접견이 이루어지던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고종황제(중앙)가 이토히로부미(고종의 왼편부터)와 이완용등 친일 각료에 둘러싸여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


반일정책 내각구성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을 청나라에서 빼았았고 요동반도(랴오둥반도)를 할양받아 만주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것에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 대한 간섭이 심해지는 계기가 되었고 고종은 미국,러시아등과 가까운 김홍집,김윤식,이범진,박정양,이완용 등으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여 반일정책을 펴나갔습니다.


후에 일본은 삼국이 간섭하여 요동반도를 잃었고 후에 남하하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벌이기에는 역부족이라 판단하여 1895년 10월 8일에 러시아와 가깝게 지내려는 명성황후를 낭인과 훈련대를 경복궁에 투입시켜 시해하여 친러시아파의 생명선을 끊는 을미왜변을 일으킵니다.  고종은 1895년 8월에 일본의 강요에 의해 김홍집을 내각수반으로 하는 제3차 김홍집 내각을 구성합니다. 나라에 힘이 없어 청에 휘둘리고 일본에 휘둘리다가 결국에는 명성황후까지 시해하는대까지 온것입니다.



이때 3차 갑오개혁의 내용 가운데 단발령은 전국에 있는 유생들과 백성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키는데 유생을 주축으로 국모의 시해에 대한 원수를 갚고 단발령의 주모자를 처벌하는 전국적인 의병전쟁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을미의병이라고 합니다. 일본군이 의병을 토벌하기 위해 한성을 비우게 되자 고종황제는 1896년 2월 11일에 경복궁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영토에서 청과 왜가 싸우고 거기에 러시아,독일,프랑스의 삼국간섭까지 하였고 일본에서 유리한 고지선점을 위해 명성황후를 시해하였고 후에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까지 주변국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나라로 한걸음더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