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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근대 역사

민족연합전선의 첫걸음인 좌우합작운동과 신간회 활동

신간회 1주년 기념사진


좌우합작운동과 신간회사건에 대해서 궁금해서 알아보도록 합니다. 신간의 활동이란 1927년 2월 15일에 서울 종로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250여명이 창립한 신간회는 사회주의계열 기독교계,언론계,천도교계,불교계 등이 참여한 우리나라 최초의 좌우합작 운동이며 민족유일당 운동의 첫걸음으로 평가됩니다.


해외에서 상해임시정부와 무장단체의 항일운동이 격렬하게 진행되고있을때 국내에서는 일제의 문화통

치에 회유되어 이른바 실력양성론자들의 변절이 잇따랐습니다. 





본래 실력양성이란 민족경제의 확대 교육계몽운동,물산장려운동,민립대학설립,우리말 사용 등 내적 역량을 키우고 독립을 추구하는 비타협 운동이었지만 192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최남선,이광수 등 대표적인 실력양성론자들은 민족개조론과 자치론을 내세우며 일제와 타협하였습니다.


6.10만세운동의 촉진제가 되었던 순종의 장례식 장면


이런 가운데 1917년의 러시아혁명은 한국의 사회주의운동에 불을 당겼습니다. 일제를 몰아내려는 민족해방과 지주계급을 무너뜨리고 평등을 실현하려는 계급혁명은 조선사회에서 지식인들에게 매력적인 이념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1923년의 신사상연구회, 1924년의 북풍회,화요회 등이 조직되고, 1925년에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가 조직되었습니다. 1926년에 좌익은 순종의 장례식에 대규모의 6.10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일제의 문화정책과 회유정책으로 민족세력은 사분오열되고 우파민족주의자들의 실력양성운동은 일제에 빌붙은 타협주의자로 낙인찍히고 사회주의 계열은 6.10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가 탄압받아 조직이 무너지기 직전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세력과 온건좌파들이 이념적으로 중도적인 중앙당,민족유일당을 건설하여 민족운동을 결집하고자 시도하였습니다.


EBS 광주학생항일운동과 신간회의 관계


좌우합작운동은 1925년에 결성된 조선사정연구회와 1926년에 조직된 정우회로 나타났고 이것이 확대되어 1927년 2월에 신석우,안재홍,홍명희,문일평등 민족주의 계열과 이갑성,이승훈 등 기독교계 권동진 등 천도교구파, 한용우등 불교계, 공산당원 한위건등 28명의 발기인에 의해(신간회 회장 이상재,부회장 홍명희)가 결성되었습니다.


신간회 운동은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회를 개최하고 조선인에 대한 착취기관의 철폐, 일본인의 조선이민 반대, 타협적 정치운동배격,조선식 교육의 실시,사상연구의 자유등을 주장하였습니다. 신간회운동은 1929년 6월에 민족좌파인사인 허헌을 집행위원장으로 하는 대규모의 민중대회를 추진하였습니다. 특히 신간회는 원산노동자 대파업,단천의 농민운동, 1929년 11월 3일에 일어난 광주학생의거를 배후에서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신간회는 1930년대에 이르러 김병로등 일부 간부진들이 자치운동에 합류하고, 사회주의 계열은 소련의 코민테른이 지시한 민족세력과의 분리투쟁을 받아들여 신간회의 해체를 원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신간회는 1931년 5월에 자진해산하면서 민족세력과 사회주의세력의 첫 번째 좌우합작운동은 아쉽게도 끝을 맺고 말았습니다.(참고서적 :  단숨에 읽는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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