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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근대 역사

이봉창, 윤봉길의거 그리고 김구의 한인애국단과 상해사변 이야기

이봉창, 윤봉길의거 그리고 김구의 한인애국단과 상해사변 이야기

상해사변 전승기념식

1920년대는 여러사건으로 인해 무장투쟁이 크게 약화되고 있었습니다. 상해임시정부가 여러계파의 분열로 자기 역할을 하지 못하자 테러를 통한 독립투쟁이 일어났습니다. 1919년 김원봉은 테러무장조직인 의열단을 조직하고 단재 신채호는 1923년에 이 단체의 행동강령인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였습니다. 의열단은 민중들이 직접 폭력혁명으로 일제를 무너뜨리고 민중정부를 세운다는 목표아래 1920~21년에 부산,밀양,종로등의 일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몇년후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조선식산은행,조선총독부에 권총을난사하여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습니다.



의열단은 1920년대 후반부터 조직적인 투쟁으로 전환하면서 무장투쟁의 역량을 걍화하는 방향으로 노선이 바뀌었습니다. 1931년 9월18일에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동북지역을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꼭두각시 정부인 만주국을 세워 독립군을 만주에서 몰아내는 한편 중국 북부지역으로 군사역량을 결집하였습니다.


윤봉길의사의 도시락 폭탄으로 인한 피해모음


이로써 만주지역의 무장투쟁은 거의 힘을 상실하였고 독립기지를 잃은 상해임시정부는 중국 내에서 고립되거나 조직이 와해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김구는 임시정부 내에 비밀결사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1931년 12월 13일에 이봉창으로 하여금 일왕을 처형케 하였습니다. 하지만 1932년 1월8일에 이봉창은 동경에서 일왕을 향해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처단에는 실패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거대한 중국인의 잠자고 있던 대일적개심을 촉발시켰으며 한중 양국의 공동의 적이 일본임을 대니외에 알린 쾌거로 의미가 있습니다.




이봉창 의거 후 일제는 1월 8일에 일본거류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해군을 파겨하여 중국 상해를 점령한 이른바 상해사변을 일으켰습니다. 일제는 상해의 한국 독립 세력을 뿌리뽑으려 했지만 국제적인 비난이 가해지자 상해철수를 단행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일본군은 일왕의 생일인 4월29일 천장절에 상해전승축하식을 홍구공원에서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국민군인 19로군


상해사변이란?


상해사변은 상하이 사변이라고도 불리는데 중국과 일본의 중요한 군사적 충돌이었습니다. 1937년에 발발한 중일 전쟁의 전초전 성격을 지닌 전투로 중국에서는 1월 28일날 일어난 사건이라고 해서 일이팔사건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전투는 중국의 19로군이 상해방어진지에서 여러번의 일본군의 공격을 모두 방어하며 당황케만든 전투였으나 3월1일이 되자 잘 방어해오던 상해를 버리고 모두 철수를 시작하며 일본에게 상해를 점령하게 하는 사건으로 갑작스런 철수에는 청나라 숙친왕의 딸인 금벽휘라는 여인의 농간에 놀아났다느 ㄴ설이 있습니다. 일본군에 의해 거직정보를 중국군에흘려 철수를 유도했다고 하여 후인 1928년에 장제스에 의해 총살됩니다.



김구는 윤봉길과 협의하여 중국군에 있던 김홍일 장군에게서 도시락 폭탄 2개를 입수하였는데 윤봉길이 던진 도시락 폭탄은 중앙연단에서 터져 상해침략군 사령관 시라가와 육군대장,상해거류민단장 가와바다를 즉사시켰으며 해군 3함대사령관 노무라 중장은 실명하였습니다. 9사단 우에다 육군중장과 주중공사 시게마쓰는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이 사건으로 상해임시정부는 프랑스 조계를 떠나 중경으로 피신하는 대장정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 참고서적 : 단숨에 읽는 한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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