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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선 역사

익선관을 쓰지 않았던 막내 하성군이 나라의 주인이 되다. - 선조 이야기 -


중종의 능인 정릉


선관은?

익선관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왕이 평상복인 곤룡포를 갖추고 정무를 볼 때 쓰던 관입니다. 왕만 착용했기 때문에 왕의 상징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회세자의 죽음과 하성군

명종은 인순왕후 심씨와의 사이에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이 순회세자는 열살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순회세자가 세상을 떠나고 후사를 고르게 되는데 후사의 대상을 중종의 손자 중에서 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릅니다. 당시에 명종의 왕비인 단경왕후에게는 소생이 없었고 장경왕후의 아들인 인종에게도 후사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경빈 박씨는 아들 복성군과 함께 사약을 받아서 죽었고 희빈 홍씨의 아들 봉성군도 역모에 연류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됩니다. 이제 남은 손자는 창빈 안씨의 둘째 아들인 덕흥대원군의 세 아들밖에 없었는데 덕흥대원군은 중종의 일곱째 아들이자 막내였습니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명종이 익선관을 한번씩 써보라며 덕흥대원군의 세 아들인 하원군과 하릉군 그리고 하성군에게 지시했지만 첫째와 둘째는 덥석 익선관을 머리에 썼고 셋째 하성군은 어찌 신하된 자가 성상께서 쓰는것을 쓰냐며 내려놓았다고 합니다. 이때 하성군의 말을 들은 명종은 기특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후에 임금과 아비 중 누가 더 중하다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하성군은 임금과 아비는 다르나 충효는 다르지 않다고 대답해 그 후에는 명종이 하성군을 총애해 자주 대궐로 불렀다고 합니다.


이런것이 계기가되어 명종이 갑작스레 쓰러지는 1567년(명종22년)에 인사불성 상태로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는데 영의정 이준경이 후사에 대한 이야기를 묻자 인순왕후는 전에 받아둔 서신을 읽는데 그 내용은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이 후사를 잇도록 하라고 선언했습니다. 조선 건국이래 처음으로 적자가 아닌 서손인 서자의 아들이 왕위를 잇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선조인 하성군 입니다.




원군 추존


선조는 왕실의 방계로써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친부인 덕흥군은 대원군으로 추존되었습니다. 조선왕조에서 대원군은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 대원군,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 대원군, 철종의 아버지인 전계 대원군,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 대원구 등 모두 4명입니다.


선조가 16세에 왕위에 오르자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가 수렴청정했지만 지난날 문정왕후 섭정의 부작용을 의식했는지 7개월 만에 섭정을 거두었고 선조는 17세에 친정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선조는 선조 2년인 1569년 의인왕후를 맞아들였지만 의인왕후는 몸이 약해 후사를 잇지 못했고 선조는 공빈 김씨와 인빈 김씨를 비롯한 여덟명이나 되는 후궁을 맞았고 13난 10녀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중 공빈 김씨가 낳은 둘째 아들이 광해군입니다.


참고서적 : 조선왕조실록을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