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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선 역사

궁궐 건축 사업으로 민생 황폐의 길을 걸은 광해군


광해군의 궁궐 건축사업


민생을 황폐하게 만들어서 비난을 받은 대규모 궁궐 건축 사업은 어떻게 진행되었던 것일까? 이는 기본적으로 와권강하 작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는데 광해군은 궁궐 건축 사업에 병적으로 매달렸다고 한다. 광해군은 돈을 마련하기 위해 금이나 은을 받고 관직을 팔았고 심지어 석물이나 목재까지 징발했다. 서북 변방을 방어하기 위한 재정 지원이 시급하고 궁궐 건축의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전국에 파견된 조도사의 작폐가 극심하다는 지적이 빗발치는데도 궁궐 건축 사업을 무리하게 추진했다.




조선왕조는 개국당시 궁궐 두개를 지었다. 이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제1 궁궐을 정궁 제2 궁궐을 이궁이라고 불렀다. 조선 초기의 1궁은 경북궁이며 2궁은 창덕궁이었다. 성종은 재위 기간 중 청상과부가 된 생모 인수대비를 포함해 세명이나 되는 과부 대비들을 위해 창경궁을 지었다. 경복궁과 창경궁을 남향으로 지은 것과 달리 창덕궁을 동향으로 지은것이 바로 이때문이다. 이로써 조선의 왕궁은 모두 셋이 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궁궐이 모두 불타 버렸다. 광해군은 즉위 하자마자 복원사업에 매달려 이내 창덕궁과 창경궁을 복원했다.


많은 사람들이 광해군이 경복궁을 복원 대상에서 제외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것이다. 원래 경복궁 중건은 선조 이래 궁궐 복원의 최대 과제였으나 여력이 없어 전혀 손을 대지 못했다고 한다. 광해군은 좌우의 간언을 물리치고 복원 사업에 매달리면서 법궁인 경복궁만큼은 신중하기 위해 복원 사업을 뒤로 미뤄놓았다. 광해군 일기 8년 8월 14일 기록이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인조반정 직후 인조는 서궁으로 가 인목대비를 알현하고 즉조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한 뒤 8일 후 인목대비와 더불어 창덕궁으로 옮겼다.조선의 5대 궁궐 가운데 경복궁을 제외한 창덕궁과 창경궁,경운궁,경덕궁의 4대 궁궐과 지금은 사라진 인경궁을 포함해 모두 다섯개 궁궐을 광해군이 중건하거나 새로 지었다. 건축에 매달렸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당시 광해군이 풍수설에 현혹되지 않고 경덕궁과 인경궁을 새로 짓는 노력을 경복궁 복원에 기울였다면 능양궁과 그의 인척들이 반정에 적극 참여하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을지도 모를일이다.





궁궐 건축은 비록 왕권 강화를 위한 것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의 황폐한 경제 사정을 외면하고 민생을 황폐하게 만들었다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반정 세력의 비판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