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Orangeline



Statistics Graph
Total593,107
Today271
Yesterday512

글 보관함



최근에 받은 트랙백


선조는 중종과 청빈안씨 소생인 덕흥군의 셋째아들로서 방계혈통으로 국왕에 오른 첫 번째 군주였습니다. 정통성을 주장할 수 없는 군주였기 때문에 우유부단하고 도량이 넓지 못했습니다. 사림파의 동서분당은 선조의 기질과 많은 관련이 있는 셈이었죠. 명종 시기에 훈구파를 제거하는데 앞장선 심의겸의 이조전랑 추천권으로 불거진 사림파의 동서분당은 조선시대의 후기 역사를 가름하는 거울이었습니다.


이조전랑이 중요한 이유는?


이조전 랑은 정 5품의 정랑직인데 자신의 후임자를 천거할 수 있는 자대낭천권이 있었으며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3사의 대간을 선발하는 통천권이란 권한이 있었습니다. 특히 통천권은 의정부의 3정승까지 견제할 수 있는점에서 요직가운데 매력있는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낭천권과 통천권은관리를 추천하거나 천거할 때 사용되던 권리로 낭천권과 통청권이라고 합니다. 사헌부(관리,감찰),사간우너(간원,탄핵),홍문관(왕의 국정자문)은 조선시대의 언론기관으로 정사를 감시하고 비판하며 감찰기능을갖춘 기관은 사헌부,사간원,홍문관으로 이를 3사로 불렀습니다.



붕당이 분열하는 원인과 과정은?


선 조때에 중앙권력을 장악한 사림들은 척신들의 제거에 적극적인 신진사림과 소극적인 기성 사림으로 입장의 차이가 드러났습니다. 이때 관리의 선발권을 가진 이조전랑의 자리를 두고 기성 사림은 심의겸을 신진사림은 김효원을 지지하면서 기성 사림은 서인,신진 사림은 동인으로 갈라서고 사림은 드디어 동서 분당이 되었습니다.





심 의겸의 이조전랑을 김효원이 반대하고 훗날 김효원이 천거되자 심의겸이 반대하면서 중앙조정은 두사람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처 김효원이 이조전랑이 되자 김효원을 지지하는 젊은 사림들이 심의겸을 공격하면서 갈등은 더해갔습니다. 구세력을 대표하던 심의겸을 지지하는 세력은 서인으로 기호학파와 노론,소론이었습니다. 신진세력의 구심체였던 김효원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은 영남학파로 북인과 남인으로 구성된 동인이었습니다.



율 곡이이가 죽고 서인이 집권하던 시기에 3사를 중심으로 동인들이 세력을 넓히자 서인에 속해있던 정여립이 동인으로 옮겨갔다. 정여립은 배신자로 낙인 찍혀 서인들이 공격을 받자 진안으로 낙향하여 그곳에서 대동계를 조직하고 군사훈련을 시켰는데 이를본 선조는 정여립을 역모자로 규정하고 서인계통 이었던 정철에게 사건수사를 맡겨 보복수사를 강행하였고 기축옥사를 일으킵니다. 하지만 서인의 집권은 정철이 세자책봉 문제로 실각을 하여 물러나고 동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Orangeline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이번에는 전에 다녀온 초지진 옆에 있는 강화도의 포대인 덕진진에 대해서 포스팅 합니다. 덕진진은 강화도 입구에 있는 초지진의 다음 포대로 신미양요때 격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합니다.

덕진진은 조선시대 강화해엽을 지키는 요충지로 원래는 수군에 속한 진이었습니다. 덕진돈,남장포대등이 모두 덕진진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돈대와 포대는 숙종 5년에 설치했습니다. 병인양요때는 양헌수 장군의 부대가 밤을 틈타 이 진을 통하여 정족산성에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했었습니다. 덕진진의 성문인 공조루는 무주개 모양의 홍예문만 남아있었지만 1977년에 모두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위에 사진은 광성보 내에 있는 용그림입니다. 광성보는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강화도로 천도후에 돌과 흙을 섞어 해협을 따라 길게 쌓은 성으로 광해군 10년에 고려시대의 성을 보수하고 광성보를 설치하였으며 그후 숙종때 이르러 완전한 석성으로 축조하였다고 합니다.


광성보 내부에는 밖에 바다를 내다볼 수 있는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망원경은 무료로 보실 수 있습니다.




덕진돈대를 강제로 점령한 미국군사들이 주변 지형을 살펴보는 장면입니다. 덕진돈대 가는길에 세장의 사진이 있었는데 그것을 촬영해왔습니다.

덕진돈대를 강제 점령한 후 성조기를 게양하는 모습입니다. 덕진돈대의 지금 가는 반대편에서 그린 사진입니다.

덕진진 앞쪽 해안가에 경비를 서고 있는 해군장교 1명과 수병 5명 염하강 건너편으로 김포의 덕포진 일대와 손돌의 묘가 있는 언덕이 바라보입니다.

포가 설치되어있는 남장포대 입니다. 남장포대는 덕진진의 소속된 포대로 강화의 8개 포대중 하나로 대포 10문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고종 8년인 신미양요때 덕진돈대와 함께 미국 아세아함대와 맹렬한 포격전을 전개하며 성첩과 시설물이 그때당시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1977년에 다시 복원하여 유지하고 있습니다.

덕진돈대로 가는길 중간에 작품을 만드는분을 봤습니다.



아이들이 매우 관심있어 하는 곳이었습니다. 모두 돼지코를 하고 있는 작품을 만들고 계시더군요.



덕진돈대로 향하는 길입니다. 경사가 있고 가는길에 계단으로 되어있어 약간 힘이 듭니다. 하지만 못올라갈 정도는 아니니 산책기분으로 다녀오시면 될것 같습니다.


덕진돈대는 덕진진의 2개 돈대중 하나로 북쪽의 광성보와 남쪽의 초지진 중간에 위치하여 강화수로의 가장 중요한 요지이기도 합니다. 신미양요 당시 미국함대와 48시간 동안 치열한 포격전을 전개하였는데 이때 파괴되었었습니다. 위와 마찬가지로 1977년에 모두 복원하였습니다.



덕진돈대 바로 옆에 길을 따라 살짝 내려가면 바다가 보이는곳에 경고비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 경고비는 고종 4년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강화 덕진첨사가 건립한 것으로 개화기에 외국선박의 출입을 통제하엤다는 척화의 의지를 담고 있는 비입니다. 경고비에는 해문 방수타국선신물과 라고 각인되어 있습니다.

지금 강화도에 복원된 덕진돈대 입니다. 위에 신미양요때의 그림과 거의 일치하는 부분이지요? 신미양요,병인양요때 프랑스와 미군의 침략을 받아서 역경을 이겨냈지만 그 전쟁들은 결코 누가 승리했다고 말할 수 없는 침략일 뿐이었습니다. 이곳을 돌아보며 힘들었던 그시절의 조상들의 고초를 한번 되세겨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Orangeline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2014.10.06 11:04 신고 BlogIcon 지후대디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의 장소들을 아이들과 보고 오셨군요. 저도 이런 여행 많이 가야 하는데 아직은 둘째가 좀더 커야 할까 봅니다.

  2. 2014.10.06 12:19 신고 BlogIcon 에스델 ♥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적인 장소에 다녀오셨군요^^
    아이들과 함께 나들이하기 좋은 곳 같습니다.
    그리고 귀여운 돼지코의 장승 작품도 무척 귀엽습니다.ㅎㅎ
    즐거운 월요일 보내세요!

  3. 2014.10.06 16:57 신고 BlogIcon 마니737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참 전에 강화도에 놀러 갔던 기억이 납니다.ㅋ
    잊고 지내던 추억 덕분에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4. 2014.10.06 22:05 신고 BlogIcon 쭈니러스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5. 2014.10.06 22:49 신고 BlogIcon Tae-Ho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우~꽤나 산책로와 포대가 멋졌던 걸로 기억됩니다. 와이프와 데이트하며 걸었던 추억이 떠오르네요~~



외국 사신의 접견이 이루어지던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고종황제(중앙)가 이토히로부미(고종의 왼편부터)와 이완용등 친일 각료에 둘러싸여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


반일정책 내각구성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을 청나라에서 빼았았고 요동반도(랴오둥반도)를 할양받아 만주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것에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 대한 간섭이 심해지는 계기가 되었고 고종은 미국,러시아등과 가까운 김홍집,김윤식,이범진,박정양,이완용 등으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여 반일정책을 펴나갔습니다.


후에 일본은 삼국이 간섭하여 요동반도를 잃었고 후에 남하하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벌이기에는 역부족이라 판단하여 1895년 10월 8일에 러시아와 가깝게 지내려는 명성황후를 낭인과 훈련대를 경복궁에 투입시켜 시해하여 친러시아파의 생명선을 끊는 을미왜변을 일으킵니다.  고종은 1895년 8월에 일본의 강요에 의해 김홍집을 내각수반으로 하는 제3차 김홍집 내각을 구성합니다. 나라에 힘이 없어 청에 휘둘리고 일본에 휘둘리다가 결국에는 명성황후까지 시해하는대까지 온것입니다.



이때 3차 갑오개혁의 내용 가운데 단발령은 전국에 있는 유생들과 백성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키는데 유생을 주축으로 국모의 시해에 대한 원수를 갚고 단발령의 주모자를 처벌하는 전국적인 의병전쟁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을미의병이라고 합니다. 일본군이 의병을 토벌하기 위해 한성을 비우게 되자 고종황제는 1896년 2월 11일에 경복궁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영토에서 청과 왜가 싸우고 거기에 러시아,독일,프랑스의 삼국간섭까지 하였고 일본에서 유리한 고지선점을 위해 명성황후를 시해하였고 후에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까지 주변국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나라로 한걸음더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Orangeline

댓글을 달아 주세요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