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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건국한 나라이며 1392년부터 1910년 마지막 임금인 순종에 이르기 까지 27명의 왕이 518년간 승계하며 지속되었습니다. 당시 정세는 권문세족이 날뒤는 가운데 정치는 약화되고 왕권은 쇠퇴되었으며 이민족의 침입이 되는등의 혼란은 자주 발생하였는데 태조인 이성계는 홍건적 및 왜구를 물리쳐 명성을 높여 정계에 발을 딛었고 신진사대부인 정도전,조준등과 손을 잡고 위화도회군을 단행하여 왕위에 올라 나라를 개창하였습니다. 


조선의 성격과 실패의 원인


조선의 문명의 성격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조선은 과거제도를 통해 양반 관리를 선출하는 관료사회였으며 주자학을 바탕으로 하는 문치주의와 법률과 무력이 아닌 교화로 다스리는 인본정치, 왕권과 신권이 권력을 공유하며 균형을 이루는 시스템조직으로 이루어진 사회라 정의 할 수 있습니다.


조선사회는 이런점에서 충분히 성공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는데 이런 시스템이 권력투쟁과 경제이득이 독점으로 이어지면서 건강하고 투명했던 사회기풍과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나아가 두차례의 전란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대한 자기반성과 슬기로운 극복을 통해 사회분위기를 전환시키고 미래지향적인 대안을 찾아야 했지만 곧바로 당쟁으로 치달으면서 조선사회는 내부자산을 갉아먹는 자기부패의 먹이사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조선의 문명은 충분히 성공할 수 있었고 근대화의 전환점에 민족의 운명을 책임질 수 있는 독창적인 문명이었습니다.




조선이 찾지 못한 여섯가지 교훈


그렇지만 조선은 적어도 여섯가지 측면에서 반성과 교훈을 찾지 못하고 실패한 세력을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근대화를 슬기롭게 맞이하지 못하고 외세의 힘과 타율에 의해 개화되는 불행과 함께 끝내는 국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 여섯가지는 이성계의 위화도회군,훈구파의 권력 장악과 부패,2대 전란에 대한 책임의 부재,건설적 대안이 없던 당파 논쟁,정조개혁의 좌절,60년간 세도정치를 들 수 있습니다.


조선은 전기,후기에 걸쳐 여러차례 변화의 기회를 맞이했으나 이상의 6가지 요인에 의해 자기발전의 토대를 쌓지 못하고 실패한 문명으로 역사에 기록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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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1.11 10:28 신고 BlogIcon 에스델 ♥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선실패 원인 6가지를 살펴보니~
    모두 아쉽기만 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2. 2014.11.11 16:39 신고 BlogIcon Sunyoung Cho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반도 역사 중에서 평화롭고 좋은 시대였던거같긴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들이 세계의 흐름을 읽지못하고 우물안 개구리식 경향을 지닌거같습니당..ㅠ

  3. 2014.11.11 17:28 신고 BlogIcon 마니737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많은 왕들은 결국 왕으로서의 역활은 하지 못했네요~
    정조의 개혁이 언제나 아쉽습니다!!!

  4. 2014.11.13 22:01 신고 BlogIcon 찡코~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러 정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번에 초대장을 주셔서 감사드린다는 말 전하고 싶었는데요,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몰라서 여기 댓글로 마음전해요~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초대장을 받은 만큼 열심히 활동하고 있어요~^^~( http://diet-life-0317.tistory.com/ )...제 블로그 주소예요!
    주소는 그냥 올려봤어요!!!^^

    • 2014.11.14 09:20 신고 BlogIcon Orangeline  댓글주소  수정/삭제

      초대장 배포한 분들 사이트 정보가 표시됩니다. 다이어트 관련 바나나 그림있는 블로그 전에 구경한번 했습니다. 글 열심히 올리셔서 좋은 정보를 공유하는 블로그가 되세요~



요즘 TV에서는 조선초기부터 시작해서 후기까지 사극 드라마에 조선시대 역사가 재조명 되고 있습니다. 조선이라 하면 몇몇 생각나는 왕들이 있긴하나 그중에 이산이라고 하는 정조가 특히나 떠오릅니다. 정조의 시대가 조선시대의 르네상스라고 생각해 이부분에 대해서 포스팅해볼까 합니다. 르네상스라고 하면 학문이나 예술의 재생,부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르네상스는 고대의 그리스문화를 이상으로 하여 부흥시켜 새문화를 창출해내는 운동이라 말할 수 있는데 범위가 건축,미술,사상,문학등 여러가지 부분에 걸쳐 새문화의 재창출을 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로마제국의 중세시대부터 르네상스까지의 시기를 야만시대라고 부르는데 인간성이 말살된 시대로 파악하고 고대의 부흥을 통하여 야만시대를 극복하려 르네상스,문화운동을 중요시 하게됩니다.



정조는 왜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었나?


정조는 영조의 손자로 임호화면때 변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세도세자가 폐세자가 되자 영조는 일찍세상을 떠난 아들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켜 정조를 왕세자에 책봉하게 됩니다. 정조의 큰아버지격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한것은 폐세자가 되었기 때문에 왕세자로 책봉할 입지가 없어서 입적 후 책봉하게 된 것입니다. 영화 정조에서 정조가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고 이야기 한것은 큰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르네상스 문예 부흥의 요인


문예 부흥의 요인은 세계관의 변화와 경제성장 그리고 정치안정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세계관의 변화의 예로는 소중화 의식과 우리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시기였습니다. 경제성장은 문화 소비 욕구의 증가와 중인 계층 문화의식의 초취가 요인이며 정치안정으로는 영,정조 문화 활동 지원에 의한 정치안정이라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문예부흥의 계층별 역할


당시 계층은 양반,중인,평민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 양반은 실학자 중심의 출판 저술 활동,신분제 모순 지적 중인,서민의식이 고취되었습니다. 중인의 역할은 시문학활동,미술활동, 판소리 보급 및 정립 그리고 문화소비자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평민의 역할은 문화 소비자의 역할과 민화,탈춤,판소리,광대놀이등 창작공연등의 소비자 였습니다. 문예부흥과 계층별 역할로 인해 조선의 문예 중흥시대가 개막되었습니다.



정조의 개혁은 여러면에서 질서정연하고 장기적,체계적으로 주도되었지만 정조의 개혁은 갑자기 정조가 세상을 떠남과 동시에 끝났습니다. 죽음과 동시에 조선사회의 마지막 희망과 기대는 정조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고 무능한 왕의 연속인 60년간의 세도정치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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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1.11 20:18 신고 BlogIcon 지후대디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조 이야기를 먼저 쓰셨군요. 저도 써야 하는데 점점 글쓰기가 힘들어 지는 요즘입니다.


선조는 중종과 청빈안씨 소생인 덕흥군의 셋째아들로서 방계혈통으로 국왕에 오른 첫 번째 군주였습니다. 정통성을 주장할 수 없는 군주였기 때문에 우유부단하고 도량이 넓지 못했습니다. 사림파의 동서분당은 선조의 기질과 많은 관련이 있는 셈이었죠. 명종 시기에 훈구파를 제거하는데 앞장선 심의겸의 이조전랑 추천권으로 불거진 사림파의 동서분당은 조선시대의 후기 역사를 가름하는 거울이었습니다.


이조전랑이 중요한 이유는?


이조전 랑은 정 5품의 정랑직인데 자신의 후임자를 천거할 수 있는 자대낭천권이 있었으며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3사의 대간을 선발하는 통천권이란 권한이 있었습니다. 특히 통천권은 의정부의 3정승까지 견제할 수 있는점에서 요직가운데 매력있는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낭천권과 통천권은관리를 추천하거나 천거할 때 사용되던 권리로 낭천권과 통청권이라고 합니다. 사헌부(관리,감찰),사간우너(간원,탄핵),홍문관(왕의 국정자문)은 조선시대의 언론기관으로 정사를 감시하고 비판하며 감찰기능을갖춘 기관은 사헌부,사간원,홍문관으로 이를 3사로 불렀습니다.



붕당이 분열하는 원인과 과정은?


선 조때에 중앙권력을 장악한 사림들은 척신들의 제거에 적극적인 신진사림과 소극적인 기성 사림으로 입장의 차이가 드러났습니다. 이때 관리의 선발권을 가진 이조전랑의 자리를 두고 기성 사림은 심의겸을 신진사림은 김효원을 지지하면서 기성 사림은 서인,신진 사림은 동인으로 갈라서고 사림은 드디어 동서 분당이 되었습니다.





심 의겸의 이조전랑을 김효원이 반대하고 훗날 김효원이 천거되자 심의겸이 반대하면서 중앙조정은 두사람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처 김효원이 이조전랑이 되자 김효원을 지지하는 젊은 사림들이 심의겸을 공격하면서 갈등은 더해갔습니다. 구세력을 대표하던 심의겸을 지지하는 세력은 서인으로 기호학파와 노론,소론이었습니다. 신진세력의 구심체였던 김효원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은 영남학파로 북인과 남인으로 구성된 동인이었습니다.



율 곡이이가 죽고 서인이 집권하던 시기에 3사를 중심으로 동인들이 세력을 넓히자 서인에 속해있던 정여립이 동인으로 옮겨갔다. 정여립은 배신자로 낙인 찍혀 서인들이 공격을 받자 진안으로 낙향하여 그곳에서 대동계를 조직하고 군사훈련을 시켰는데 이를본 선조는 정여립을 역모자로 규정하고 서인계통 이었던 정철에게 사건수사를 맡겨 보복수사를 강행하였고 기축옥사를 일으킵니다. 하지만 서인의 집권은 정철이 세자책봉 문제로 실각을 하여 물러나고 동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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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사에서 가장 슬프고 놀라운 사건


임오화변은 조선 역사에서 가장 쇼킹한 사건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형제를 죽이는등의 권력다툼은 항상 있었으나 자식을 뒤주에 가두고 8일을 굼겨 죽이는 사건은 정말 놀라운 사건입니다. 1762년인 영조 38년 5월13일에 벌어진 이 사건은 영조와 사도세자의 여러가지 갈등에 의해서 빚어진 사건입니다. 군사들을 시켜 모든 문을 몇겹으로 막고 칼을들고 담을 겨누 서게하여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고 영의정만이 들어올 수 있게 했다고 합니다. 그때 사도세자는 무명옷을 입고 있었는데 보통 무명옷은 부모님이 돌아가겼을때 입는 옷이라 영조의 큰 화를 샀다고 합니다. 그 후에 사도세자의 방을 모두 뒤졌는데 많은 종류의 칼들이 나와 영조인 아버지는 분노했다고 합니다.





영조와 장헌세자(이선)의 갈등


사도세자는 어렸을때부터 경종을 모시던 나인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경종이 죽을당시 독살하였다는 의심을 했다고 합니다. 경종을 지지하던 소론과 가깝게 지내며 노론을 경제하여 영조에게 부담을 주었고 영조가 시행하던 탕평책과 관련있는 탕평파를 멀리했다고 합니다. 사도세자가 미쳤다고 표현되는곳은 아내인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과 영조의 영조실록에서 동일하게 화병으로 인해서 미쳤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반면에 아들인 정조의 주장이나 고증실록을 보면 머리가 좋은 신동으로 군주로써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역사는 승자에 의해서 작성된것이라 어느정도는 감안해서 읽어야 할것 같습니다.




임오화변의 사건전개 과정


임오화변의 사건전개과정을 추측해 보자면 영조와 사도세자 간에 갈등이 증폭되면서 사도세자의 정신병으로 발전이 되었고 정신병으로 인해 세자로 그리고 아들로서 영조의 여러가지 신망을 잃었을 것입니다. 세자의 고변 이후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임으로서 사도세자의 아들인 '이산'을 세손으로 책봉하게 됩니다.


나경언의 고변


세자가 죽게된 원인중 하나로 나경언의 고변이 있습니다. 세자의 비행을 적은 것인데 이것이 10가지였다고 합니다. 사람을 죽이거나 북한산성에 놀러가고 상인에게 돈을 빌린것등 10가지였는데 영조는 이것을 읽고 크게 분노했다고 하여 각종 비행인 살인등으로 엄청 꾸짖었으며 국고를 풀어 빌린돈을 갚는데 그양이 엄청나서 또 분노했다고 합니다. 이글을 쓴 나경언은 후에는 참수되었는데 처음엔 용감하다고 해서 칭찬을 받았었다고 합니다. 세자가 뒤주에 갖혀 죽은 원인을 제공한 사람중에 한명으로 명분의 이유로 아마도 참수되었다고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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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0.03 12:18 신고 BlogIcon Tae-Ho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타까운 정쟁의 희생양이 사도세자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지금의 정치판도 그닥..다르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더러운 정치판으로 인한 국력의 낭비가 정말 엄청나거든요...
    잘 보고 갑니다~~~ 또 올께요~~

  2. 2014.10.10 09:55 신고 BlogIcon 늙은 호텔리어 몽돌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엊그제 읽은 글입니다만 총망한 아들, 이산의 성장도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이끈 한 원인일 수도 있다는 분석이 있더군요.
    최근에 다시 느낍니다만 조선시대의 왕은 참 불행한 삶을 살아갔던 듯 합니다.

    • 2014.10.29 13:35 신고 BlogIcon Orangeline  댓글주소  수정/삭제

      불행한 것인지 행복한것인지 그때 안살아봐서 모르겠습니다만 백성은 아무래도 머 찢어지게 가난했던것은 사실인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