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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사도세자 이선의 임오화변 사건전개과정


조선 역사에서 가장 슬프고 놀라운 사건


임오화변은 조선 역사에서 가장 쇼킹한 사건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형제를 죽이는등의 권력다툼은 항상 있었으나 자식을 뒤주에 가두고 8일을 굼겨 죽이는 사건은 정말 놀라운 사건입니다. 1762년인 영조 38년 5월13일에 벌어진 이 사건은 영조와 사도세자의 여러가지 갈등에 의해서 빚어진 사건입니다. 군사들을 시켜 모든 문을 몇겹으로 막고 칼을들고 담을 겨누 서게하여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고 영의정만이 들어올 수 있게 했다고 합니다. 그때 사도세자는 무명옷을 입고 있었는데 보통 무명옷은 부모님이 돌아가겼을때 입는 옷이라 영조의 큰 화를 샀다고 합니다. 그 후에 사도세자의 방을 모두 뒤졌는데 많은 종류의 칼들이 나와 영조인 아버지는 분노했다고 합니다.





영조와 장헌세자(이선)의 갈등


사도세자는 어렸을때부터 경종을 모시던 나인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경종이 죽을당시 독살하였다는 의심을 했다고 합니다. 경종을 지지하던 소론과 가깝게 지내며 노론을 경제하여 영조에게 부담을 주었고 영조가 시행하던 탕평책과 관련있는 탕평파를 멀리했다고 합니다. 사도세자가 미쳤다고 표현되는곳은 아내인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과 영조의 영조실록에서 동일하게 화병으로 인해서 미쳤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반면에 아들인 정조의 주장이나 고증실록을 보면 머리가 좋은 신동으로 군주로써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역사는 승자에 의해서 작성된것이라 어느정도는 감안해서 읽어야 할것 같습니다.




임오화변의 사건전개 과정


임오화변의 사건전개과정을 추측해 보자면 영조와 사도세자 간에 갈등이 증폭되면서 사도세자의 정신병으로 발전이 되었고 정신병으로 인해 세자로 그리고 아들로서 영조의 여러가지 신망을 잃었을 것입니다. 세자의 고변 이후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임으로서 사도세자의 아들인 '이산'을 세손으로 책봉하게 됩니다.


나경언의 고변


세자가 죽게된 원인중 하나로 나경언의 고변이 있습니다. 세자의 비행을 적은 것인데 이것이 10가지였다고 합니다. 사람을 죽이거나 북한산성에 놀러가고 상인에게 돈을 빌린것등 10가지였는데 영조는 이것을 읽고 크게 분노했다고 하여 각종 비행인 살인등으로 엄청 꾸짖었으며 국고를 풀어 빌린돈을 갚는데 그양이 엄청나서 또 분노했다고 합니다. 이글을 쓴 나경언은 후에는 참수되었는데 처음엔 용감하다고 해서 칭찬을 받았었다고 합니다. 세자가 뒤주에 갖혀 죽은 원인을 제공한 사람중에 한명으로 명분의 이유로 아마도 참수되었다고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