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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고려 역사

최치원 당나라에서 신라로 돌아온 까닭은 시무10조(시무10책) 때문일까?



최치원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최치원은 대표적인 유학생출신으로 도당유학생이라고도 합니다. 도당유학생은 신라의 골품제도 아래에서는 출세의 길이 막히자 당나라로 유학한 사람들을 말하는데요 보통은 세분류로 나뉩니다. 군인,학생,승려 세가지인데 군인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는 장보고라고 할 수 있죠. 승료로는 의상,표훈등이 이름을 남겼으며 학자로는 최승우,최치원,최언위가 현재 잘 알려져 있는 인물 입니다.




최치원은 12살에 당나라에 들어가 빈공과라는 과거에 급제하여 선주 율수현의 현위가 됩니다. 황소농민군의 반란이 일어나자 토벌대장이었던 고변의 추천으로 최치원은 종사관에 임명되어 유명한 토황소격문을 지어 이름을 날라기 시작했습니다. 최치원은 황소농민군의 반란이 끝나고 신라로 귀국하여 대산군의 태수가 되는데 이때부터 최치원은 신라의 내정을 개혁하는 작업을 추친하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임금이었던 진성여왕이 최치원의 시무10여조를 받아들이지 않자 벼슬을 던지고 해인사로 들어가 은거하였습니다. 후에 왕건이 고려를 개국하자 최치원은 후손들에게 "계림(신라)는 누런잎이요 곡령(고려)은 푸른 솔"이라 하면서 왕건을 섬길것을 전파하였다고 합니다. 여러 문집들을 남겼는데 사육집,계원필경등이 있습니다.



최치원이 신라로 돌아온 까닭은 아마도 시무10조를 신라에 적용시키려 하지 않았을까 예상합니다. 도당유학생이라 신라의 골품제도에 분명히 불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후손들을 위해 이것을 해결하고자 힘을 썼을것입니다.(참고 : 단숨에 읽는 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