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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남북국시대와 후삼국 역사

해상왕 장보고 그리고 청해진 이야기




장보고의 옛 시절


오늘은 해상왕이라고 불리는 장보고와 청해진에 대한 짤막한 이야기를 담아보려고 합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장보고는 해도 출신으로 장씨에 이름은 궁복이었다고 합니다. 현재 장보고라 불리지만 실제 이름은 장궁복이었습니다. 어린시절 당나라로 건너가 무과시험에 합격하면서 그의 군인의 길은 시작이 됩니다. 당나라 군대가 현재는 그리 좋은 의미는 아니긴 합니다만 당나라군대 출신으로 30세에 서주에 주둔하고 있던 황제의 친위군대인 무령군의 소장이 되었습니다. 818년에 당나라 중앙군과 치청진 군대가 전쟁을 벌일 때 장보고는 당나라군대로 출전하여 군공을 쌇았고 이 시기에 당나라 중앙정부는 주변 절도사의 연이은 발란으로 해상무역을 통제하지 못하게 되자 824년에 장보고에게 당나라 동부해안을 통제하고 해상무역을 관리하도록 하였습니다.


장보고의 청해진


장보고는 지금 상둥성 위해의 적산 법화원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828년에 신라 흥덕왕에게 건의하여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게 되어 1만의 군대를 보유하여 동아시아의 해상무역을 장악하는 계기가 됩니다. 장보고가 설치한 청해진은 중국의 산동성 적산,양자강 유역의 영파,청해진 완도, 일본 구주의 대재부를 연결하는 해상으로 추정합니다. 1만여명의 수군들은 동아시아 바다를 순행하며 해적선을 소탕하고 무역선을 보호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장보고의 몰락...


839년에 무진주의 장관이었던 김우징이 김양의 도움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장보고는 반란군에 동참하여 그를 신무왕에 옹립하고 중앙정계에 진출하였습니다. 김우징은 장보고의  군공을 이정하여 신분이 낮았던 장보고의 딸을 세자비로 맞아들이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김우징의 아들이 문성왕이 된 후 약속을 어기자 장보고는 신라에 등을 돌렸습니다 하지만 이때 무진주의 벌가였던 염장이 신라 골품귀족들의 사주를 받아 장보고를 시해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해상왕 장보고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청해진의 병사들은 김제평야로 끌려가 벽골제를 만드는 노역을 하였다고 합니다.또한 완도는 공도 정책에 따라 빈섬이 되어버렸습니다.



장보고의 해상왕국은 비록 20년에 불과하지만 역사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해상왕국이었던 백제유민드은 장보고의 선단에 참여하여 동아시아의 해상무역을 독점하고 이들의 세력이 훗날 왕건의 건국을 후원하는 호족세력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김제에 끌려간 청해진 병사들의 후예들은 훗날 견훤이 신라를 반대하고 무진주에서 봉기를 일으킬 때 참여하여 후백제 건국의 주체가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또한 장보고의 해상무역권은 뒷날 후삼국,발해,중국의 5대 10국을 잇는 청자무역권이 발판이 되었습니다.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며 해적선소탕과 무역선보호등의 주임무를 하였고 지리적특징과 고대 해상교통로의 중심지에 위치하며 해상무역왕국의 건설의 전초기지를 마련했지만 정치로 인해 귀족들의 견제와 제거의 대상이 되며 생을 마감했습니다. 항상 역사의 진정한 인물은 정치로 인해 제거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지금도 그렇고 예전에도 한민족의 안타까운 현실인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