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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선 역사

광해군의 폐륜정치에 저항한 한음 이덕형 이야기


어릴적 전래동화로 오성과 한음 이야기를 들은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어떤 이야기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우애가 좋은 친구였다는 기억만 남아있습니다. 오늘은 기억도 되심을겸 광해군의 폐륜정치에 저항했던 한음 이덕형에 대해서 포스팅해봅니다.


오성과 한음?


오성은 이덕형과 과거장에서 만난 이항복을 말합니다. 이항복은 이덕형보다 5살이 많으며 이항복의 작위명이 오성부원군이었기 때문에 오성으로 불리게 되었고 한음은 이덕형의 호가 한음이기 때문에 한음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전래동화에 보면 어릴적부터 서로 사귀어 친해졌다는 이야기는 잘못 알려진 이야기 입니다. 이덕형의 후손 이명교의 말에 의하면 승정원일기에 오성이 다섯살 많다고 기록으로 남겨져있습니다. 남들보다 빠르게 친해지고 마음이 잘맞았던것으로 예상이 되는 부분이며 본모습보다 민간이야기에서 우애가 좋다는것이 알려져있던 것으로 보아 나이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별한 우정을 나눈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한음 이덕형의 출생은?


한음 이덕형은 1561년에 지금의 남대문 근처인 한성 성명방이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영의정인 유전의 누이동생이었으며 외동아들로 태어났으며 머리가 똑똑하고 지혜롭고 글을 잘 쓰기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유명한 옛 인물들을 보면 거의 한결같은것이 어릴적부터 영특하고 지혜로웠다는것은 한결같은것 같습니다.한음 이덕형을 만난 사람들은 뛰어난 문장과 인품에 감동을 받았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글솜씨와 인간됨은 대단했던것으로 생각됩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엄친아라고 집도 잘살고 머리도 좋은 엄친아가 잘 어울렸을것 같습니다. 큰외삼촌이 영의정이었으니 집안은 볼것도 없겠네요.


세명의 이씨 인재를 알아본 율곡이이


20세에 우수한 성적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대제학이었던 율곡 이이에게 눈에띄어 홍문관정자가 되었습니다. 이때 세명의 이씨가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를 하였는데 그것이 오성 이항복과 이정립이었습니다. 이 세명의 급제동기는 나란히 호당에 들어가 홍문관의 직책에 배치되어 벼슬길대로를 달리게 되는것이죠. 후에 박사,수찬,교리,이조정랑에 이어 당상관,동부승지,대사간,부제학,대사성,이조참의,예조참판으로 31세?에 나이에 대제학에 오릅니다.


자고일어나면 직급이 달라져있더라!


선조때니까 임진왜란을 겪은 세대로 임진왜란때는 유성룡,이항복을 도와 전략을 짜내어 국가적 위기를 모면하는데 도우미 역할을 했으며 명나라 사진으로 원군요청에 성공했고 이항복과 함께 군사정책을 수행했습니다. 이후 의정부좌의정에서 도원수 그리고 41세에 영의정이 되었습니다. 임진왜란때 호성공신,선무공신에 추천되었으나 본인이 사양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광해군 정권의 저항 징비록의 이덕형


한음 이덕형은 대북파의 탄핵에 몰려 물러났는데요. 경기도 양근근처에 기거하였으며 영창대군과 인목대비 폐모론을 강하게 반대한 이유였습니다. 광해군때 영창대군이 처형되었는데 이에 극렬이 반대하며 상소를 올렸으나 그런 이유로 모든 관직에서 삭탈되었고 후에 병이 악화되어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서애 류성용이 기록했던 징비록에도 이덕형은 등장하는데 징비록에 보면 오성 이항복과 죽마고우였고 과거에 급제 그리고 우에 기록된 벼슬들 그리고 정유년에 왜군이 재침있댔다는 정유재란에서 전후의 사태를 수습하였고 영의정에 올라 광해군에 영창대군 처형과 폐모론을 반대하다 사직하고 국사를 걱정하다 병으로 운명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맺으며


어릴적 전래동화로 들었던 오성과 한음보다는 역사적 사실로 볼때 나라의 전란을 수습하고 불의에 반대한 이런부분들은 전래동화로만 아른거리던 한음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로 기억될것 같습니다. 한음 이덕형에 대해서 포스팅한김에 아이들에게 오성과 한음 책을 구해서 이야기를 들려줘야겠습니다. 당대 최고의 문인이었던 한음 이덕형 항상 나라를 걱정했던 이분은 다른 위인들과는 틀리게 유명하지 않았던 마치 축구스타인 박지성의 플레이처럼 팀을 위해 조용히 뛰어다니는 그런스타일이 아니였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