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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선 역사

광해군 저평가의 원인 그리고 광해군은 정말 대동법에 힘을 실어줬을까?




광해군은 어떻게 알려져있나?


역사는 암기식 공부를 하는것이 아니라 질문을 계속 던지는식의 공부를 해야합니다. 질문을 던져 토론을 통해 살이있는 역사공부를 해야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고 또한 재밋는 공부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을 계속 외우기 보다는 왜 그렇게 했어야만 했는지 이야기로 기억하는 방법을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광해군은 재조명되는 왕으로 머리가 좋고 유능하고 대동법을 실시하여 민생을 안정시켰으며 외교의 달인으로 알려져있습니다. 하지만 불운하여 왕에서 짤려 조선역사에 이름이 올라있습니다. 이런 중요한 포인트들이 왜그렇게 알고있는지 문제는 무엇인지 한번 알아보았습니다.


광해군의 가족환경과 임해군


광해군의 아버지인 선대왕 선조는 정식부인이 2명이었습니다. 첫번째는 의인왕후였는데 자식을 낳지 못하였고 임진왜란 끝나고 사망하게 됩니다. 당시 후궁인 공빈김씨에게 물려주어야 했는데 원래는 첫째인 임해군을 세자로 임명해야 했으나 임해군의 성정이 엉망이라 세자자리를 물려주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엉망이었냐 하는것은 여러가지 였는데 특히 뇌물과 방납의 달인이었다고 합니다. 방납은 공물을 대신 납부하고 이자를 받는일을 말하는데 얼마나 심했냐면 임진왜란이 일어났을때 궁궐을 비우고 선조가 도망갔을때 백성들이 궁궐을 불지르는등의 왕에대해 배신감을 느껴 이런일들을 저지리는데 그때 백성들이 가장먼저 찾아다녔던것이 임해군이었다고 합니다.




임해군이 적자 광해군이 서자인데 하지만 적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대충 얼마나 심했는지 이해가 가는부분이죠. 그래서 둘째인 광해군에게 물려주는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정식부인이 생기죠? 개족보가 탄생하는데 인목왕후는 광해군보다 나이가 10살이상 어렸었고 그당시 자식인 영창대군이 왕의자리를 물려받았어야 하나 당시 광해군의 세력이 있었고 영창대군을 보호하고자 아마도 광해군에 왕의 자리를 물려주었습니다. 본처의 자식인 영창대군과 후궁의 자식인 광해군이 왕의자리를 두고 선택이 되는데 2살짜리와 30살 이상의 어른이 왕좌를 두고 싸워야 했었습니다. 



드라마,영화의 소재로 자주 쓰이는 광해군


불안한 광해군의 세자생활


광해군의 아버지인 선조는 왕이 될수가 없는 사람이었으나 운으로 왕이된 케이스기 대문에 왕이되어서 컴플렉스가 상당히 심했다고 전해집니다. 후에 왕은 적자가 왕이 되어야 겠다는 심리적인 생각이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에 선조는 임진왜란때 광해군이 전란을 수습한것을 인정하지 않았을 정도로 광해군을 좋아하지 않았던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렇게 세자생활은 불안정했습니다. 아마도 광해군도 스트레스가 심했을 것으로 예상이 되네요. 선조가 죽자 인목왕후에서 인목대비가 되며 광해군을 울며 겨자먹기로 왕으로 책봉했으며 세자때부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지 심리적인 불안함으로 왕권강화를 주장했습니다.



광해군 과거 저평가의 원인! 역사적 최대 실수


보통 역사를 보면 불안한 지위때문에 정적들을 제거하는 방법과 포용하여 설득하는 방법이 있는데 제거하는 방법은 광해군의 예이며 후자는 정조 정도로 예를들 수 있습니다. 광해군 첫번째 실수는 친형인 임해군을 귀향보내서 죽여버린 것입니다.명나라는 이것이 이상하여 수사를 하게 되는데 이미 임해군이 귀향간 상태였으며 많은 은으로 뇌물을 주어 보내 수습했습니다. 이때부터 중국에서 사신을 보내면 꼭 뇌물을 주는 안좋은 예가 생겼다고 합니다. 친형을 죽이고 왕에 오른것이 첫번째 실수 였으며 두번째 실수는 영창대군이 왕위준비를 한다는 소문을 빌미로 강화도로 유배보내게 되는데 방에 계속 불을 넣어 영창대군이 방에서 방방뛰어다녔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렇게 방에 불을 때어 쪄죽이다 싶이 했는데 아마도 배후는 대북정권의 이이첨이 그랬다는 설이 있습니다. 설마 강화도부사는 아니였을것이고 배후는 아마도 이이첨이나 정인홍 정도가 아닐까 예상됩니다. 광해군이 직접 지시 했느냐 안했느냐 따지기도 하지만 어차피 광해군이 묵인했다는 결과가 나오니 뻔한 상황입니다. 추가로 폐륜입니다. 영창대군의 어머니이이자 광해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위시킨 일입니다. 지금도 어머니를 건드리지 않는것이 인지상정인데 조선시대에 어머니를 폐위시켜 역사에 남는 폐륜의 발자취를 남기게 됩니다.





광해군은 정말로 대동법에 힘을 실어줬을까?


광해군은 원래 대동법의 반대론자의 성격을 띕니다. 원래는 이원익이 주장한것이 대동법이었는데 이원익은 영창대군의 역모에 엮여 실각당하자 폐지를 주장하였고 결국 대동법이 확산되는것을 광해군은 경기도로 제한하였습니다. 결국엔 확산되는것을 막았던사람이었고 지방에서 공납을 끌어다 궁궐건축을 하였는데 이것에 차질을 받을까봐 대동법을 막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광해군이 폐륜으로 일컽는 왕이 되어버린것은 알고보면 문제가 있는 왕이라 봅니다. 임진왜란때 선조는 의주에 박혀있고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지휘하며 전란을 수습했던것으로 보아 인재였던것은 인정해야할 부분이지만 폐륜을 저질렀던 광해군은 후대까지 폐륜의 아이콘으로 불리고 있다가 얼마전 영화 광해때부터는 재평가되고 있습니다. 어차피 재평가 한다고 하지만 의동생을 죽이고 친형을 귀향보내 죽여버리는 임금은 아마도 정상적인 임금은 어떻게 보면 인조반정때 제거되지 않았어도 제대로 업무수행을 못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