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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홍경래의 난 그리고 민란의 시대 민란의 시대의 시작 19세기는 전국에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정조 연간의 신해통공등의 정책으로 의주상인 임상옥(송상,만상,경상,래상)등 상공업자본이 형성되면서 근대화의 전화점을 맞이했지만 세도정치의 출현과 삼정의 문란으로 개혁의 꿈은 사라지고 백성의 삶은 더욱 고통의 수렁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예전에 의주상인 임상옥의 이야기인 드라마 상도가 인기를 끌었던 기억이 나네요. 다시 보고싶은 드라마 입니다. 세상이 썩어가고 세도정치의 매관매직으로 해먹을 사람들은 정해있고 더불어 전염병에 흉년까지 정말 백성이 살기 힘든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에 백성은 살기 힘들어지자 여기저기에서 봉기하여 일어나는 민란의 시대가 개막이 되었는데 이것을 홍경래의 난이라고 합니다. 1811년 12월에 평안도를 거점으로 홍경래는 서북인에..
해상왕 장보고 그리고 청해진 이야기 장보고의 옛 시절 오늘은 해상왕이라고 불리는 장보고와 청해진에 대한 짤막한 이야기를 담아보려고 합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장보고는 해도 출신으로 장씨에 이름은 궁복이었다고 합니다. 현재 장보고라 불리지만 실제 이름은 장궁복이었습니다. 어린시절 당나라로 건너가 무과시험에 합격하면서 그의 군인의 길은 시작이 됩니다. 당나라 군대가 현재는 그리 좋은 의미는 아니긴 합니다만 당나라군대 출신으로 30세에 서주에 주둔하고 있던 황제의 친위군대인 무령군의 소장이 되었습니다. 818년에 당나라 중앙군과 치청진 군대가 전쟁을 벌일 때 장보고는 당나라군대로 출전하여 군공을 쌇았고 이 시기에 당나라 중앙정부는 주변 절도사의 연이은 발란으로 해상무역을 통제하지 못하게 되자 824년에 장보고에게 당나라 동부해안을 통제하고 해상..
신미양요의 격전지인 강화도의 덕진진과 덕진돈대 탐방기 이번에는 전에 다녀온 초지진 옆에 있는 강화도의 포대인 덕진진에 대해서 포스팅 합니다. 덕진진은 강화도 입구에 있는 초지진의 다음 포대로 신미양요때 격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합니다.덕진진은 조선시대 강화해엽을 지키는 요충지로 원래는 수군에 속한 진이었습니다. 덕진돈,남장포대등이 모두 덕진진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돈대와 포대는 숙종 5년에 설치했습니다. 병인양요때는 양헌수 장군의 부대가 밤을 틈타 이 진을 통하여 정족산성에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했었습니다. 덕진진의 성문인 공조루는 무주개 모양의 홍예문만 남아있었지만 1977년에 모두 복원되었다고 합니다.위에 사진은 광성보 내에 있는 용그림입니다. 광성보는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강화도로 천도후에 돌과 흙을 섞어 해협을 따라 길게 쌓은 성으로 ..
숙종은 왜 환국정치(경신환국,기사환국,갑술환국)를 하였을까? 숙종국장도감의궤 어린 숙종의 뛰어난 정치력 숙종은(1674~1720) 어린나이에 임금이 되었는데 그때가 14세 였습니다. 숙종이 뛰어난것은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뚜렸한 정치적인 식견으로 군약신강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군약신강은 왕권이 약하고 신하의 입김이 강한상태를 말합니다. 숙종은 1675년인 15나이게 왕의 권위와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 송시열을 함경도 웅천으로 귀향을 보냈습니다. 어찌보면 15세와 75세의 싸움에서 15세인 숙종의 승리로 끝난일입니다. 숙종은 환국이란 방식으로 자신의 입맛에 맞게 여러당파를 장악하였습니다. ※환국은 숙종 연간에 서인과 남인이 세차례에 걸쳐 정권을 교체한 사건을 말합니다. 경신환국이란? 경신환국은 1680년(숙종6년)에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이 바뀐사건입니다. 숙종은..
사도세자 이선의 임오화변 사건전개과정 조선 역사에서 가장 슬프고 놀라운 사건 임오화변은 조선 역사에서 가장 쇼킹한 사건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형제를 죽이는등의 권력다툼은 항상 있었으나 자식을 뒤주에 가두고 8일을 굼겨 죽이는 사건은 정말 놀라운 사건입니다. 1762년인 영조 38년 5월13일에 벌어진 이 사건은 영조와 사도세자의 여러가지 갈등에 의해서 빚어진 사건입니다. 군사들을 시켜 모든 문을 몇겹으로 막고 칼을들고 담을 겨누 서게하여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고 영의정만이 들어올 수 있게 했다고 합니다. 그때 사도세자는 무명옷을 입고 있었는데 보통 무명옷은 부모님이 돌아가겼을때 입는 옷이라 영조의 큰 화를 샀다고 합니다. 그 후에 사도세자의 방을 모두 뒤졌는데 많은 종류의 칼들이 나와 영조인 아버지는 분노했다고 ..
의병전쟁과 명성황후 시해 그리고 고종 황제의 아관파천 외국 사신의 접견이 이루어지던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고종황제(중앙)가 이토히로부미(고종의 왼편부터)와 이완용등 친일 각료에 둘러싸여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 반일정책 내각구성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을 청나라에서 빼았았고 요동반도(랴오둥반도)를 할양받아 만주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것에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 대한 간섭이 심해지는 계기가 되었고 고종은 미국,러시아등과 가까운 김홍집,김윤식,이범진,박정양,이완용 등으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여 반일정책을 펴나갔습니다. 후에 일본은 삼국이 간섭하여 요동반도를 잃었고 후에 남하하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벌이기에는 역부족이라 판단하여 1895년 10월 8일에 러시아와 가깝게 지내려는 명성황후를 낭인과 훈련대를 경복..
훈구파와 사림파 그 정치적 뿌리는 무엇일까? 훈구파와 사림파의 정치적 뿌리를 찾아보려면 고려말기로 돌아가 이야기를 해야합니다. 고려말에 신흥 사대부들은 정치적인 입장에따라 두가지로 나뉩니다. 고려를 계속 지켜나가려는 정몽주와 길재등의 고려사수파와 고려에 종지부를 찍고 조선을 개국하려는 정도전,조준등의 조선혁명파로 나뉘어집니다. 고려사수파 고려사수파는 조선개국에 불참을 하고 향촌에 은거하며 학문연구와 후배양성에 집중하게되여 이것이 사림파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고려사수파 정몽주,이색,길재 조선혁명파 조선혁명파는 여러차례 정치적 격변기에 공신으로 책봉되고 나아가 외척이 되거나 왕실과 공신간의 혼맥을 통해 점차 세력을 형성하였으며 왕실자제나 종친들의 관리임용을 금지하는 법령을 제정하여 드디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훈구파로 성장하게됩니다. 훈구파에 ..
수양대군의 계유정란과 황표정사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시대의 배경 이시대 배경을 살짝 살펴보면 세종대왕이 의정부서사제를 시행하였습니다. 이 의정부서사제는 앞에 의정부에 의미가 있는데 의정 들이 정치를 한다는 의미로 간추릴 수 있습니다. 의정은 좌의정,우의정,영의정이라 하여 의정들의 부 라고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의정부라 하는것이지요. 세종이 죽고 문종이 왕위를 이어 받았지만 세종인 아버지에게 병까지 물려받는터라 왕위를 수행할 수 없어 단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죽게됩니다. 죽기전 분명 문제가 있을거라 생각된 문종은 영의정,우의정,좌의정에게 어린 단종을 보필하라 부탁을 하고 죽게됩니다. 이때 황보인,김종서가 의정부를 이끌고 있었으므로 이들이 맡았으나 한명회를 참모로한 수양대군과 무리들이 무참한 살육으로 계유년에 난을 일으켜 김종서,황보인을 모두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