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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근대 역사

6.25 전쟁과 남북분단의 역사 -1- (대한민국 건국 준비) 해방공간과 남북분단 오늘은 우리나라의 분단역사를 간단하게 정리해보는 포스팅을 해봅니다. 모두다 아시듯 1945년 8월 15일에 일제는 미국의 전쟁개입으로 패망하고 무조건 항복 선언을 하였습니다. 당시에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단체로는 상해의 임시정부와 국내의 건국동맹정도였습니다. 새로운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많이 부족한 상황이었죠. 여운형은 해방직후에 건준위라 불리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건국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전국 145개 지역에 치안대를 설치하고 9월6일에는 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습니다. 여운형 인민공화국은 새로운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국이 인정하지 않는 조직이었으며 민족주의 우파들도 탈퇴한상황이었고 상해정부의 김구 주석이 참여하지 않았으며 조선공산당을 재건한 박헌영이 참여하면서 좌익일변도의..
이봉창, 윤봉길의거 그리고 김구의 한인애국단과 상해사변 이야기 이봉창, 윤봉길의거 그리고 김구의 한인애국단과 상해사변 이야기 상해사변 전승기념식 1920년대는 여러사건으로 인해 무장투쟁이 크게 약화되고 있었습니다. 상해임시정부가 여러계파의 분열로 자기 역할을 하지 못하자 테러를 통한 독립투쟁이 일어났습니다. 1919년 김원봉은 테러무장조직인 의열단을 조직하고 단재 신채호는 1923년에 이 단체의 행동강령인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였습니다. 의열단은 민중들이 직접 폭력혁명으로 일제를 무너뜨리고 민중정부를 세운다는 목표아래 1920~21년에 부산,밀양,종로등의 일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몇년후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조선식산은행,조선총독부에 권총을난사하여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습니다. 의열단은 1920년대 후반부터 조직적인 투쟁으로 전환하면서 무장투쟁의 역량을 걍화하는 ..
민족연합전선의 첫걸음인 좌우합작운동과 신간회 활동 신간회 1주년 기념사진 좌우합작운동과 신간회사건에 대해서 궁금해서 알아보도록 합니다. 신간의 활동이란 1927년 2월 15일에 서울 종로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250여명이 창립한 신간회는 사회주의계열 기독교계,언론계,천도교계,불교계 등이 참여한 우리나라 최초의 좌우합작 운동이며 민족유일당 운동의 첫걸음으로 평가됩니다. 해외에서 상해임시정부와 무장단체의 항일운동이 격렬하게 진행되고있을때 국내에서는 일제의 문화통치에 회유되어 이른바 실력양성론자들의 변절이 잇따랐습니다. 본래 실력양성이란 민족경제의 확대 교육계몽운동,물산장려운동,민립대학설립,우리말 사용 등 내적 역량을 키우고 독립을 추구하는 비타협 운동이었지만 192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최남선,이광수 등 대표적인 실력양성론자들은 민족개조론과 자치론을 내세우..
청산리전투 승리의 댓가 경신참변,간도학살사건 이야기 일제강점기의 대승을 거뒀던 청산리전투의 승리내용과 청산리전투로 인해 경신참변(간도학살사건)을 겪은 이야기를 포스팅해봅니다. 청산리전투의 대승은 멋졌지만 이를 계기로 잔혹한 학살사건을 이끈일본군의 만행을 다루었습니다. 아프고 잔인한 역사를 겪었던 일제강점기 시대를 되돌아보고 곱씹어 역사를 본보기로 삼아보고자 글을 정리해봅니다. 1920년에 북간도와 서간도를 무대로 무장투쟁을 주도한 단체는 군정보, 대한군민회군,북로군정서,대한독립군,대한의용군,광복군총영 등이 있었습니다. 이들 무장독립단체는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다들며 일본군과 교전하였는데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전투가 1920년 6월부터 10월까지 벌어진 청산리전투였습니다. 청산리전투는 1920년 6월에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이 주축이 되어 치룬 봉오동전..
고종의 대한제국의 수립과 구본신참,광무개혁 아관파천에 성공한 고종은 친일내각을 처어산하고 이완용,윤치호,이범진등을 주축으로 친러내각을 구성하게 된다. 친러 내각은 단발령의 취소,태음력의 환원,의정부 복구,내각제의 폐지등을 추진하였고 이시기에 자주권에 대한 열망으로 청의 지배권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해야한다는 여론이 있었다. 고종은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견제하면서 변법자강파를 물리치고 동도개화파를 등용하여 부국강병과 황제권위를 세우고자 하였다. 고종은 연호를 광무라고 하고 원구단에서 황제즉위식을 거행하고 나라이름 또한 대한제국으로 바꾸었ㅅ다. 헌법에 해당하는 9개조의 대한국 국제를 발표하는데 이른다. 황제의 군권장악과 국방력 강화를 위해 원수부가 설치되었고 무관학교가 설립되었다. 또한 근대적인 토지소유권을 위해 1898년에 양지아문이 세워지고 후에..
한국 근대사의 이정표 갑오개혁,을미개혁에 대한 정보 갑오개혁(1894)과 을미개혁(1895)의 의미는 갑오년에 시작해서 을미년에 개혁을 끝냈다고 해서 갑오,을미개혁이라고 합니다. 갑오개혁이 중요한것은 지금 우리가 하고있는 근대사의 의식주는 이 갑오개혁을 기준으로 모두 바뀌게 되었는데 일단 기존에 있던 모든 의식주의 방법이 이 갑오개혁을 기준으로 바뀌게 됩니다. 어떤내용이 바뀌는지 알아보겠습니다.일본에 간섭이 있었지만 자주적으로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과거시험이 사라지다 과거시험은 고려시대 광종때 시작되었는데 갑오개혁을 기준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의 시험은 형식적으로 변했으며 청탁에 의해 썩어빠져 갑오개혁때 시험을 없애게 됩니다. 이후에 공무원시험이 치뤄지게 되기는 합니다. 도량형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쓰는 단위가 지역별로 틀렸다고 합니다. 예를들..
의병전쟁과 명성황후 시해 그리고 고종 황제의 아관파천 외국 사신의 접견이 이루어지던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고종황제(중앙)가 이토히로부미(고종의 왼편부터)와 이완용등 친일 각료에 둘러싸여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 반일정책 내각구성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을 청나라에서 빼았았고 요동반도(랴오둥반도)를 할양받아 만주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것에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 대한 간섭이 심해지는 계기가 되었고 고종은 미국,러시아등과 가까운 김홍집,김윤식,이범진,박정양,이완용 등으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여 반일정책을 펴나갔습니다. 후에 일본은 삼국이 간섭하여 요동반도를 잃었고 후에 남하하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벌이기에는 역부족이라 판단하여 1895년 10월 8일에 러시아와 가깝게 지내려는 명성황후를 낭인과 훈련대를 경복..
병인양요,신미양요,운양호사건을 겪은 강화도의 초지진 탐방 추석때 강화도에 다녀오면서 들렀던 초지진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초지진은 강화도로 들어오는 바다 입구에 처음으로 만나는 포대로 형성된 진 입니다. 초지진의 위치는 김포와 강화도의 경계인 초지대교를 강화도쪽으로 김포의 대명항 바로 건너편에 있습니다. 초지진 이란? 초지진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에 있는 포대를 형성한 진으로 줄여서 초지진 이라고 합니다. 바다에서 들어오는 적을 막기 위해 만든 요새이며 1656년에 만들어졌습니다. 초 지진은 외세의 적들이 쳐들어오는 적에대해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곳인데요 프랑스가 쳐들어온 병인양요와 미국군대가 쳐들어온 신미양요때 활약했던 곳이었고 운양호와 포격전을 전개하여 거의 파괴되었지만 1973년에 초지진을 다시 복원하였습니다. 초지진에 가보시면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