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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고려 역사

공민왕의 대외,대내적 개혁정책은 무엇일까?



공민왕의 개혁정치


고려는 원종11년에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를 하였습니다. 그 이후에 공민왕 5년까지 원나라의 간섭을 지속적으로 받았습니다. 원나라의 간섭은 고려백성이 원나라에 의한 간섭과 수탈로 인해 반원감정이 극에 달아있을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에 공민왕이 고려의 임금으로 즉위하였는데 즉위한 1351년은 중국에서 백련교도인 흥건농민군이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킨 해였습니다.



공민왕은 원나라에서 생활하다 고려로 넘어와서 임금이 되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원나라의 사정을 제대로 알고있었는데 공민왕은 2가지 측면에서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첫째는 왕권강화를 통해 내부개혁을 추진했었고 두번째로는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원나라의 간섭과 지배에서 벗어나는일을 추진했습니다. 일단 공민왕은 왕권강화를 위해 무신정권에 설치되어 신하들이 권력을 일삼던 정방을 폐지하고 모든 결재를 임금에게 받도록 했습니다. 임금과 신하들의 토론장인 서연을 개시하여 소통을 하였고 몽골풍의 의복과 두발은 즉위 이듬해인 1352년에 폐지하였습니다.





1355년에는 순제의 제2황후였던 기황후의 오빠이며 대표적인 부원파인 정동행성 참지정사 기철 일당을 제거하고 곧바로 정동행성도 폐지하였으며 원나라의 점령지였던 쌍성총관부를 탈환하고 이어 동녕부도 다시 되찾는 업적을 세웁니다.


1364년에는 승려이며 정치적으로 당파가 없는 신돈을 등용하여 전면적인 정치개혁을 단행하였는데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노비해방과 토지환수를 추진하였지만 공민왕은 권문세족의 반발이 거세지고 어느정도 개혁이 이루어지자 기득권 세력과 타협을 시도하여 이존오의 탄핵형식을 빌어 신돈을 제거하게 됩니다. 


공민왕은 지나친 개혁보다는 왕권강화수립에 목적이 있었기때문에 기득권 세력은 신돈의 기세에 눌리다가 반격의 기회를 잡아 한번에 제거하게 됩니다. 신돈에 의해 발탁된 신진사대부들은 절차와 제도에 의한 개혁을 주장했으며 신돈의 제거에 협력하는일이 발생합니다. 공민왕의 개혁은 기득권과의 타협과 개혁세력의 약화라는 결과로 끝맺어졌으며 고려는 회생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고 공민왕의 죽음과 함께 고려멸망의 서곡을 울리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