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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근대 역사

청산리전투 승리의 댓가 경신참변,간도학살사건 이야기



일제강점기의 대승을 거뒀던 청산리전투의 승리내용과 청산리전투로 인해 경신참변(간도학살사건)을 겪은 이야기를 포스팅해봅니다. 청산리전투의 대승은 멋졌지만 이를 계기로 잔혹한 학살사건을 이끈일본군의 만행을 다루었습니다. 아프고 잔인한 역사를 겪었던 일제강점기 시대를 되돌아보고 곱씹어 역사를 본보기로 삼아보고자 글을 정리해봅니다.



1920년에 북간도와 서간도를 무대로 무장투쟁을 주도한 단체는 군정보, 대한군민회군,북로군정서,대한독립군,대한의용군,광복군총영 등이 있었습니다. 이들 무장독립단체는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다들며 일본군과 교전하였는데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전투가 1920년 6월부터 10월까지 벌어진 청산리전투였습니다.



청산리전투는 1920년 6월에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이 주축이 되어 치룬 봉오동전투와 1920년 10월에 김좌진,이범석이 이끈 북로군정서의 청산리전투를 말합니다. 홍범도는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 1개 대대를 맞아 대승을 거두었고 이어지는 일본군의 반격에 맞서 김좌진과 이범석은 청산리에서 일본군 1200명을 사살하고 2천여명을 부상시키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청산리전투는 청산리대첩이라고도 부른다. 김좌진,나중소,서일,이범석등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대한신민단 예하 신민단 독립군등 주축으로 활약한 만주독립군 연합부대가 만주에 있는 지린성 화룡현청산리 백운평,천수평,완루구 등지의 10여차례에 간도에 출병한 일본제국 육군과 전투를 벌인 총칭을 청산리전투 혹은 청산리 대첩이라고 합니다.



청산리전투의 대승은 일본이 중국에 압력을 행사하여 독립군을 해체의 위기로 몰고가게 되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일제는 청산리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고 독립군기지를 뿌리뽑는 한편 아울러 간도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10월에 훈춘사건을 조작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일본군이 중국 마적단을 시켜 일본영사관을 습격케하고 그것의 죄를 한국인에게 뒤집어 씌워 간도지방에 살고있는 한국교포들을 학살하려는 음모였습니다.


일본군은 간도에 사는 1만여명의 동포를 학살하고 2500여채의 민가에 불을 지르고 30개동의 학교를 없앴는데 이를 경신참변 또는 간도학살사건이라고 부릅니다. 1921년 6월 28일 독립군부대는 일본군이 한인동포에게 가해지는 만행을 피하고자 소련과 만주의 국경지대인 밀산부로 모여 대한독립군을 조직하고 자유시로 이동하였습니다.



이때 소련군이 적군과 백군으로 나뉘어 싸우는 가운데 적군파는 일본군의 개입을 막기 위해 일본군과 밀약을 맺고 대한독립군을 무장해제 하고 수많은 독립군을 학살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독립군 초기조직이 무너지면서 대일부장투쟁의 무력은 급격하게 쇠퇴하고 이로부터 무장 항쟁은 일대 좌절을 맞았습니다. 경신참변에 잔인하게 죽은 조선인이 1만으로 구글에서 경신참변으로 조회하면 수많은 잔인한 사진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잔인한 장면을 블로그에 담을 수 없기에 한번 찾아보시고 그당시 잔인했던 전쟁을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