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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근대 역사

고종의 대한제국의 수립과 구본신참,광무개혁



아관파천에 성공한 고종은 친일내각을 처어산하고 이완용,윤치호,이범진등을 주축으로 친러내각을 구성하게 된다. 친러 내각은 단발령의 취소,태음력의 환원,의정부 복구,내각제의 폐지등을 추진하였고 이시기에 자주권에 대한 열망으로 청의 지배권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해야한다는 여론이 있었다.




고종은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견제하면서 변법자강파를 물리치고 동도개화파를 등용하여 부국강병과 황제권위를 세우고자 하였다. 고종은 연호를 광무라고 하고 원구단에서 황제즉위식을 거행하고 나라이름 또한 대한제국으로 바꾸었ㅅ다. 헌법에 해당하는 9개조의 대한국 국제를 발표하는데 이른다.




황제의 군권장악과 국방력 강화를 위해 원수부가 설치되었고 무관학교가 설립되었다. 또한 근대적인 토지소유권을 위해 1898년에 양지아문이 세워지고 후에 토지조사사업이 벌어졌다. 고종의 황제즉위와 대한제국의 수립으로 시작한 광무개혁은 1904년에 일어난 러일전쟁과 1905년의 을사약으로 좌절되고 만다.



고종이 추진한 광무개혁은 여러가지 분야에 걸쳐서 시행된다. 황재가 육,해군을 직접 통솔하게 되었고 무관학교가 개걸되는등의 군사부분의 개혁이 있었으며 대외적으로는 대한국제가 반포되었고 훈장제도가 새로 생겼다. 사회및 경제부분에서는 홍삼을 장려화하고 황제직속기관으로 가져오면서 제조 및 관광사업을 황실재정수입이 증가하였으며 지계제도를 채택하여 토지문권을 발급하게 되었다. 



또한 상공업진흥에 힘썼는데 진흥책으로 한성은행,대한은행등의 금융기관을 설립하였으며 교육면에서는 실업교육위주의 체신사무 요원의 양성을 위한 우편,전무학당이 설립되었고 상공업학교와 의사양성을 위해서 경성의학교가 설립되었다. 그 이외에도 사법기관을 정비하여 여러가지 나라를 개편하기 위해 개혁을 하였으나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재진출함에 따라 중단되었다. 보수파에 의해 추진된 갑오,을미개혁을 답습한것이었으나 국가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지향하여 비교적 외세의 간섭없이 자주적으로 추진되었다는점은 중요한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