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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선 역사

호학,호불,패도의군주 세조 수양대군



세조는 권신을 토벌하여 사직을 안정시키는데 리더쉽을 보여준 왕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얼마전에 관상 이라는 영화에 잔인한 살육을 일삼는 왕으로도 출연했지만 평가가 엇갈리는 부분이 많습니다. 이번 포스팅은 세조인 수양대군의 리더쉽에 대해서 논해보려고 합니다.


세종과 대비대는 세조의 정치


세조는 아버지인 세종의 '경연정치'와는 대비되는 정치를 했습니다. 결단력도 있었지만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그릇도 컸는데 술자리에서 신하들과 거리낌 없이 어울린게 그렀습니다. 정인지는 술취하면 세조에게 반말을 썻다고 합니다만 그럼에도 별탈이 없었습니다. 공신을 위로하는 주연이 자주 열렸는데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에서도 술자리가 이어졌고 한명회,신숙주등 최측근들만 그자리에 초대받았다고 합니다. 조선은 어떻게 풀이하면 왕의 나라에 속하지만 세조가 없었다면 김종서 등의 권신이 살아남아 조선조는 신하의 나라로 바뀌었을 공산이 컸을것입니다.



수양대군의 시호 세조


세조의 시호는 상당히 뛰어난 시호입니다. 이 시호는 원나라 최고의 명군인 원세조 쿠빌라이의 시호가 보여주듯이 신하들이 창업주에 준하는 공을 세운 인물에게 올리는 시호로 아버지,할아버지인 태종,세종보다 높은 시호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세조는 용인술이 뛰어난데 적재적소의 인재에게 일을 맡겨 난관을 돌파하는것이 특별한 능력이라과 볼 수 있습니다. 예로 재위 6년인 1460년 7월에는 여진족토벌인데 명나라와 관계 등을 고려해 토벌을 망설이는 신숙주에게 '기회는 놓칠 수는 없다. 용병할 때 가장 꺼리지 않는 것은 바로 결단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것이다.'



세조의 학문사랑


세조의 아버지인 세종에게는 첫째아들인 문종이 능력있고 호학하기는 했으나 병까지 닮아 유사시를 대비했었을 것인데 그 대상이 수양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는 수양이 문종 못지않게 학문을 좋아한 사실과 무관치 않았습니다.  수양은 유가경전에 열성을 기울인 문종과는 달리 사서 및 제자백가등 군서를 두루 읽었는데 세종이 평소 애독하던 자치통감을 수양에게 하사한것이 그 증거라 볼 수 있습니다. 세종이 수양에게 치평요람의 편찬을 감독하게 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를 계기로 집현전의 학자들과 친분을 맺었는데 훗날 수양이 이른바 계유정난을 계기로 권력을 장악하면서 신숙주를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을 대거 발탁한 배경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계유정란 패도의 중요성


계유정난은 세조의 통치 리더십이 패도에 있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에 해당되는데 자치통감등의 사서는 장구한 역사속에 드러나는 다양한 유형의 통치리더십을 전해주면서 패도가 왕도 못지않게 매우 중요한 통치리더십이라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춘추전국시대 배경으로 다루는 제자백가서 역시 난세의 상황에서는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한 패도를 통해야만 능히 득천하 및 치천하에 성공할 수 있다는것을 설득력있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이것이 군서를 읽었던 군왕이 거의 예외없이 패도의 행보를 보인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호학군주,호불군주


수양대군이 조선 국왕중 유일하게 스스로 호불군주를 칭한것은 부왕의 명을 받아 불당을 건립하고 부처의 공덕을 기리는 각종 경찬회를 주관했습니다. 이것은 세종이 왕비 심씨가 세상을 떠나자 불교에 마음이 기울었고 마침내 궁궁에 내불당을 지어 심씨의 명복을 빌고자 했는데 대소신료들이 한달넘기 강력히 반대했으나 세종은 요지부동을 보여줬습니다. 이것이 수양대군과 여러왕자들에게 불교에 대한 깊은 영향을 끼쳤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혹여는 계유정난과 사육신사건에서 많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호불군주가 되었다는 속설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것이라 생각됩니다.



이것은 세종에 이어 문종의 잇따른 죽음과 자신의 병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불교에 열중하였는데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의 문수동자상의 복장유물에서 나온 세조의 피고름이 묻은 속적삼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종과 마찬가지로 14년 동안 온몸에 창진으로 크게 고생했다고 하니 이는 세종에게서 물려받은 공산이 큽니다. 하지만 몸때문에 불교에 심취한 것은 아닌데 그 역시 호학군주와 호불군주의 행보를 보인 세종과 마찬가지로 불경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호불군주를 자처했다고 보는게 타당합니다. 이는 지나친 명분론에 치우친 조선의 일반 사대부에 대한 반감을 동반한 것이기도 했지만 계유정난 및 사육신 사건의 심정적인 배경이 여기에 있었습니다.